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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왕으로 불리는 노덕술
고문왕으로 불리는 노덕술
  • 경남매일
  • 승인 2023.09.14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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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고문왕으로 불리는 친일 악질 경찰 노덕술의 일대기를 보면 해방 후 친일 악질 경찰들이 전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지도자로 변신하는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다. 다시는 이런 역사와 이런 인물이 나와서는 안 될 것이다.

노덕술은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 보통학교 2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상의 점원으로 근무하였다. 22살에 순사가 되어 보안과에 근무하다가 승진하여 1928년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신간회 간부인 박일형 등을 체포하여 고문하였다. 이 사건으로 3명이 고문으로 죽었다.

이어서 부산상고 학생들이 주도한 항일동맹휴교(180여 명이 퇴학조치를 당함) 배후에 있는 혁조회 관련자 김규직과 유진홍 등을 체포하여 고문하였다. 김규직은 고문으로 옥사했고 유진홍도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석방을 요구한 동래고보 학생들을 체포하여 무자비한 고문을 하였다.

노덕술은 숨은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는 전문가로 혀 잡아당기기, 못 박기, 머리카락 뽑기, 거꾸로 매달아 때리기, 전기 고문 등으로 독립운동가들을 괴롭혔다. 이런 고문으로 독립운동가를 색출한 공으로 출세하였다.

일제 침략 정당화를 위한 여론 환기 및 선전활동과 친일좌담회를 35회나 주최했다. 그 댓가로 공로상을 받고 서훈을 받았으며 1943년 오늘날의 총경인 경시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22,728명의 경찰이 있었는데 조선인 경시는 8명뿐이었다.

해방 당시 평양경찰서 서장으로 있다 체포되어 처형되려다 탈출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 미군정 시절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친일경찰을 등용하려고 하자 독립운동가 출신인 수사국장 최능진이 거세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최능진은 축출되고 친일경찰이 등용되었다. 노덕술은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수도경찰청 간부 중에 이주호 통신과장을 제외하고 모두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전국적으로도 경위 이상 간부 1,157명 중에서 946명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승승장구하던 노덕술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저격혐의로 체포된 박성근을 구타하고 고문하다 죽인 사건으로 암초를 만난다. 박성근이 경찰의 눈을 속이고 도망갔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속이고는 시신을 한강의 얼음구멍에 넣었다. 그런데 6개월 뒤 시신이 떠 오르면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여론이 악화되자 노덕술과 부하들이 경무국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장택상의 명령에 따라 노덕술을 빼돌리고 기소도 하지 않았다.

1949년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전국에 수배했다. 그러나 경찰이 그의 신변을 보호해 주어서 좀처럼 잡을 수 없었다. 반민특위는 그의 애첩 김화옥을 추궁하여 은신처에 숨어있던 그를 체포하였다. 체포 당시 6자루의 권총과 많은 도피 자금을 지니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총애하는 노덕술이 체포되자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만나 석방을 종용했다. 아울러 공보처장 명의로 조사를 중지하라는 공고를 내고 반민특위법 개정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노덕술은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반민특위법 위반 외에도 수도경찰청 고문치사사건, 반민특위 요원 암살 음모사건 등으로 추가 기소되었다. 이승만은 재차 노덕술의 석방을 지시했지만 반민특위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 위원들을 빨갱이로 모는 프락치 사건을 만들어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게 하여 반민특위를 와해시겨 버렸다. 반민특위가 와해되자 노덕술은 경찰간부로 재임된다.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노덕술은 군헌병 장교로 변신한다. 1952년 치러진 선거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이승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에 많이 당선되었다.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은 국회의원이 탄 버스를 납치하여 헌병사령부에 감금한 다음 개헌을 강요하여 정권 연장에 성공하였다. 이 사건의 실행자는 특무대장 김창룡과 헌병대장 노덕술이었다. 이 일로 노덕술은 이승만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미국대사 무초는 이승만 대통령이 노덕술 등이 올리는 보고서만 믿고 미국이 제공하는 정보를 믿지 않아 한미동맹이 흔들린다는 지적을 하였다. 육군 부산 범죄수사단 단장으로 근무할 때 미국 군수물자를 빼돌리려는 오두수의 뇌물을 받고 협조하다가 1955년 재판에 회부되었다. 노덕술은 뇌물이 선거자금이라고 주장했지만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파면되었다. 김창룡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결과라고도 한다.

1960년 고향인 울산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지만 친일 악질 경찰 출신의 악행을 아는 사람들에 의하여 낙선된다. 1965년 불법 흥신소를 운영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69세로 오욕의 악랄한 삶을 마감하였다.

평생을 친일과 반민족행위로 일관했던 노덕술은 진보와 보수 양측으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 708인으로 선정되었다. 이런 노덕술이 2014년 울산시에서 자랑스런 울산인 후보에 올라 논란이 되었다.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한 교육으로 역사관과 가치관이 잘못된 공직자와 정치인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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