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22:45 (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김중걸 기자
  • 승인 2023.08.16 2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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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걸 편집위원
김중걸 편집위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소개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게임이다. 최근 방송된 MBC 예능 프로그램인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2>에서 출연자인 `기안84`가 인도 오지인 코로족 마을에서 7동 자승과 `무궁화꽃~` 놀이를 소개하고 함께했다. 코로족 마을에서는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고산 오지로 어린 동자 스님들은 <오징어 게임>을 물론 세속과의 소통과는 먼 곳이다. 7동자승들은 한국말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며 놀이에 흠뻑 빠진 모습이 방송으로 소개돼 마음이 흐뭇했다.

`무궁화`는 고조선 때부터 현재까지 민족과 함께한 꽃이다.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은 897년 효공왕을 대신해 당나라에 공식 외교 문서 `사불허북국거상표`를 보내며 통일신라를 `무궁화의 나라`라는 뜻의 `근화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나라의 사서 `구당서` 199권 `신라전`에도 신라를 근화향으로 부른 기록이 있다. `무궁화`라는 이름은 고려 후기부터 등장한다. 고려 후기 문인 이규보(1169~1241)가 1241년 쓴 `동국이상국전집` 제14권 `고율시(古律詩)`에 `문 장로와 박환고가 무궁화를 논평하면서 지은 시운을 처하다`라는 긴 제목의 시가 나온다. 조선시대 실학 서적에도 무궁화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산림경제`, `본초강목`, `화암수록` `동의보감` 등에 초가집 울타리에 무궁화를 재배하는 방법과 무궁화 약초 효능 등 실용적인 정보가 수록됐다고 한다.

또한 민간 기록과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기록한 `승정원일기`와 외교 문서를 집대성한 `동문휘고`에도 `무궁화 나라`를 뜻하는 `근화지향(槿花之鄕)` `근향(槿鄕)` `근역(槿域)` 등의 표현이 자주 나온다.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에 자주국으로서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서구식 군복ㆍ훈장ㆍ주화 등 국가 상징물에 무궁화 문양을 최초로 사용했다. 1892년 발행된 5냥 주화에는 조선 왕들의 성인 이(李ㆍ오얏나무 이)씨를 상징한 오얏 꽃과 함께 무궁화 가지를 새겼다.

무궁화(無窮花)는 나라꽃(國花)이다. 영국은 장미, 일본은 벚꽃이 나라꽃이다. 국화는 국가의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 무궁화라는 낱말은 `끝없이 피는 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꽃은 한국의 대표적인 꽃 중 하나로서, 아름다움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물이 돼 왔다. 무궁화는 높은 신중무표(神中無表)와 독특한 핀 모양의 꽃잎으로 특징지어져 있다. 이 꽃은 화려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니며, 꽃잎이 끝없이 피어나는 듯한 형태로 무궁한 희망과 영원한 행복을 상징한다. 한국문화의 근본 가치 중 하나인 인내와 굳건한 의지, 끊임없는 노력을 나타내는 상징물로도 여겨진다. 무궁화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정신을 대변하는 중요한 상징물로서 다양한 예술 작품, 문학 작품, 음악 등에서도 많이 활용돼 왔다. 이 꽃은 한국인들의 정서와 정체성을 대변하는 상징물로서 국내외에서도 폭넓은 인식과 사랑을 받고 있다.

`무궁화`는 한국인의 정서와 정체성을 대변하는 상징물을 넘어 조선의 독립을 상징하는 겨레의 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사랑하고 지켜온 무궁화를 탄압했다. 일제는 7만 그루의 무궁화를 뽑아내 불태웠다. 더욱이 `진딧물이 많이 끼고 해충이 많은 지저분한 나무` 또는 `꽃가루가 살갗에 닿으면 부스럼이 생긴다`며 왜곡하기도 했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고등경찰용어사전`에는 `무궁화 강산`, `근화` `근역` 등에 불온한 뜻이 담겼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한반도 위에 무궁화가 그려져 있었던 동아일보 제호는 1938년부터 제호의 무궁화 도안이 강제 삭제됐다. 재미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대안인국민회가 발행한 독립의연금 영수증의 테두리에는 무궁화 무늬와 함께 태극기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독립군 군가 가사에도 `무궁화` `무궁화동산` `무궁화 강산`이 등장한다. 일제의 압박에도 무궁화를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노력은 날로 커졌고 강인한 생명력의 무궁화가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과 닮아 민족을 상징하는 꽃이 됐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중계몽교육가인 남궁억 선생이 13송이의 무궁화가 한반도를 수놓은 자수를 도안했다. 또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모곡리 모곡학교 뒤뜰에 8만 그루의 무궁화 묘목을 길러 전국에 보급했다. 일제는 1933년 이 묘목을 불태워 버리고 선생을 체포했다. `무궁화 사건` 90년이 흐른 지금 해방 78년을 맞은 우리 땅에 무궁화는 길에서도 볼 수 없는 잊어져 가는 꽃이 되고 있다. 올해 산림청의 꽃나무 선호도 조사에서는 벚나무와 장미 등에 이어 7번째 간신히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독립의 상징인 `무궁화`가 나라꽃에 걸맞은 무궁화 보급 역시 독립운동가 귀환에 못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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