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22:23 (일)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3.11.13 0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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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8)
 부인에게도 자식에게도 심지어는 이웃에게도…. 그러나 유독 존대를 하는 사람이 당시 있었는데 그 사람은 다름아닌 나하고 나의 형 최화조였다.

 나는 이 인준이 삼촌 옆에만 가면 혹시 내가 잘못해 삼촌이 서운하지 않을까 해서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조심조심 존댓말로 인준이 삼촌에게 말을 건네면 삼촌은 아무렇게 있다가도 내가 다가가면 옷맵시를 추스르고 존경받을 태세를 했다.

 한 번씩은 나와 인준이 삼촌이 밖으로 나오면 동네 아이들이 “팔푼이 간다” 혹은 “바보 팔푼이” 하고 놀려대었다.

 그러면 인준이 삼촌은 대꾸도 않고 그 쪽으로 빠져나갔고 나는 인준이 삼촌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역시 꼼짝없이 따라서 팔푼이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 당시 나는 상관이 없었다. 나는 인준이 삼촌과 같이 다니는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인준이 삼촌이 나이가 들어 20살 가까이 되자 할머니는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보통 집안 같으면 그런 분은 장가가기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할머니 집안은 마을에서 나름 풍족해서 그런지 도리어 할머니가 며느리를 골랐을 정도였다.

 당시 약간 다리를 저는 분이 며느리 후보로 올랐는데 할머니는 다리를 전다고 딱지를 놓았다.

 그리고 어머니 소개로 하이면 군호 바닷가의 어느 집안의 멀쩡한 처녀를 골랐는데 그 집에서는 인준이 삼촌이 약간 모자라는 줄을 알고 작정하고 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결혼을 하고 나서 그 처녀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총각이 약간 모자라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심하게 모자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처녀 집에서 약간의 소란은 있었지만 그래도 잠잠해지고 그 처녀분은 결국 나의 숙모님 되시고 무던하게도 할머니 집에서 눌려 앉아 사시게 됐다.

 와룡산 아래에 넓은 벌리뜰은 지금은 도시로 변모해 집들이 꽉 들어차 있지만 그때에는 와룡산 골짜기의 물을 공급받아 풍성한 쌀 수확을 하는 서부 경남의 드넓은 곡창지였다.

 벌리뜰 즉 진삼 도로 옆으로는 기다랗게 동네가 형성되어 있지만 동네 안쪽에는 당시는 모두 논이었다.

 그 논의 주인들은 벌리 동네 사람들은 드물고, 거진 우리 동네 사람들이 지주들이었다.

 내가 아는 지주들은 우리 집 옆의 쌍둥이 갑용이 집, 또 내 친구 건이네 집, 시장집인 내 친구 재우네 집, 또 외사촌 누나 갑순이네 집, 그리고 재산을 나라에 몰수당한 천석꾼 충정이 형네 등의 집들이었다.

 할머니집도 벌리뜰에 논이 7마지기가 있어 지주 중에 한 사람으로 등록이 됐다.

 할머니 집은 여름이 오면 보리를 거두고 모심기를 했다. 모를 심을 적에는 이미 다 자란 나와 인준이 삼촌과 숙모 그리고 할머니 네 사람이 주도가 되어 벌리 사람 10여 명을 일당을 주고 고용해 모심기를 했다.

 일단 드넓은 벌리뜰에 나가면 나는 지주의 장손이 되어 대접이 풍성했다. 그리고 숙모님을 보면 벌리뜰 아낙네들은 하나같이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 여자는 멀쩡하면서도 돈 보고 팔푼이에게 시집왔다”고 수근덕거렸다.

 그러나 숙모님은 그 소리를 들은 척도 않고 자기 일만 했다. 그렇게 숙모님은 할머니 집에서 터를 닦으시고 아들 딸 5명 낳고 잘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인준이 삼촌은 결혼 후에 삶은 논번기에는 논에 가서 물 대기 약 뿌리기 등을 하셨고 논일이 없으시면 리어카를 끌고 어판장에 나가 남의 짐을 실어다주고 돈을 받아 썼다.

 그 돈으로 자기가 마시고 싶은 술을 실컷 마시곤 했는데 술을 마셨어도 남에게 실수를 한번도 하지 않으신 분이었다.

 인준이 삼촌은 좋은 어머니 즉 할머니를 잘 만나 한 끼도 굶어 본적도 없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곱디고운 마음씨 가지고 성실하게 사셨던 분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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