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창제된, 훈민정음의 사용법에 대해 설명해 놓은 한문 해설서 '훈민정음(訓民正音)'[해례본(解例本)]에 '밥'이라고 나와 있다.
상형문자인 고대 이집트어 'baba (to make wet, moisten, sip)'는 '물을 부어 적시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한국어 '밥 (boiled rice)'은 고대 이집트어 'baba (to make wet)'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수확한 것을 다시 물에 적셔 요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히 말해 '밥'은 '쌀', '보리' 등 곡물을 물에 적셔 지은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조선의 밥 짓는 솜씨와 밥맛은 주변국에게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 예로 청나라 학자 장영(張英, 1637~1708)은 12가지 조건이 맞아야 밥이 맛있다는 '飯有十二合說(반유십이합설)'을 썼는데, 여기에 '조선 사람이 밥을 잘 짓는데 밥알이 부드럽고 기름지며 윤기가 흐른다'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에 다녀온 조선의 사신 담헌(湛軒) 홍대용 (洪大容, 1731~1783)은 청나라의 밥그릇은 찻잔만하더라 했으며, 일본에 다녀온 사신은 왜에서는 한 끼에 쌀 3줌밖에 먹지 않더라며 놀라워했다고도 한다.
세종대왕은 "民惟邦本, 食爲民天(민유방본, 식위민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라고 했다.
이렇듯 조선인은 밥이 보약이라 믿을 만큼 끼니를 소중히 생각했고, 더 나아가 '밥'은 하늘이라 생각하고 목숨 줄이라 믿어 왔다. 그래서 '밥숟갈을 놓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한다.
경남지방에 가면 여러 형태의 '밥 무덤'이 있다. 대표적인 '밥 무덤'은 남해군 남면 홍현리 가천마을(다랭이마을, 다랑이마을)의 마을 중앙과 동쪽, 서쪽 세 곳의 밥 무덤이다.
그리고 사천시 사남면 화전리에 있는 '흙 무덤', 남해군 창선면 오룡리 '흙 무더기' 모두가 밥 무덤이다.
'흙 무덤'이나 '흙 무더기'나 일정한 장소에 흙을 쌓아 놓고 그 안에 밥을 묻었기 때문이다.
이 '밥 무덤'들은 동제(洞祭)를 지내고 제에 올린 메(밥)를 묻어 두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밤 9-10시경에 지내는 동제의 제례절차는 降神(강신), 參神(삼신), 初獻(초헌), 讀祝(독축), 亞獻(아헌), 四神(사신), 燒紙(소지), 飮福(음복)의 순서인 유교식으로 행하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소지를 5번 올리며, 소지를 올린 뒤 잿밥을 한지에 싸서 밥 무덤에 묻는다.
이러한 벽사의 의미는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혼령에게 밥을 주어 풍작과 풍어를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과 태평 축원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밥은 하늘이며, 생명 줄이고, 밥숟갈을 놓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인간의 삶을 함축해 놓은 행위라 할 것이다. 같은 밥이라도 신분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다.
흥부전을 보면 '밥이 어떻게 중한 것이라고 밥상을 치시오. 밥이라 하는 것이 나라에 오르면 수라요, 양반이 잡수면 진지요, 하인이 먹으면 입시요, 제배 즉 나이ㆍ신분이 서로 같은 사람 동배(同輩)가 먹으면 밥이요, 제사에는 진메이니 얼마나 중한가요?'라고 나온다.
밥은 한국인의 일상에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단어이다 보니, 연장자를 만나면 "진지 드셨습니까", 친구와 약속할 때 "언제 밥 먹자" 등 다양한 경우에 밥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게다가 우리말의 은어에는 감옥에 가는 것을 '콩밥', 군대 갔다는 것이나 경력을 '짬밥', 복선을 깔아 두는 것을 '떡밥', 특정 목적을 가지고 미리 손을 써 두는 것을 '밑밥' 등 밥이 포함되는 단어도 많다. 생계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직업을 갖는 것을 '밥 벌어 먹고 산다'고도 한다.
이렇듯 우리 민족에게 밥은 지극히 소중한 삶의 원천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