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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④
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④
  • 경남매일
  • 승인 2023.11.22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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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욕지도우편소는 부산우편국 분소로 초대 소장은 도미우라 가쿠타로(富浦覺太郞)였고, 과거 1912년부터 1928년까지 소장을 맡았다. 우편물은 통영과 욕지도를 주 2회 오가는 정기여객선으로 운반했다. 순사주재소는 1910년 건립되었으며 초대 수석순사로 다카나가(高英)가 부임하고 그 아래 일본인 1명과 조선인 1명이 근무했다. 처음에는 읍동 서당에 세워졌다가 이후 면민들이 부역을 하여 자부포에 건물을 신축해서 이전했다. 

과거 1914년 욕지도의 일본인 인구는 50가구 162명이었으며, 1915년에는 56호 224명이었다. 일본인 인구는 계속 늘어 1921년 말 기준 82호 292명이었다. 일본인들의 출신지는 다양했는데 많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가와현(108명), 도쿠시마현(68명), 히로시마현(28명), 오이타현(18명), 야마구치현(13명), 나가사키현(10명), 구마코토현(7명) 등이었다. 

일본자료에 의하면, 일본인들의 직업은 어업, 운송업, 상업, 목수 등으로 대부분 어업 관련 업종 종사자였다. 어업 관련 외 일본인들은, 우편소(1호, 도쿠시마현), 교사(1호, 구마모토현), 의사(1호, 나가사키현), 순사(1호, 히로시마현), 이발사(2호, 가가와현, 나가사키현), 여관(1호, 후쿠이현), 음식점(8호, 가가와현 외 5개 현 출신) 등이었다. 

욕지도 인근의 노대도는 남해안 곳곳에서 어획한 수산물의 집하장 역할을 했다. 1907년 부산수산회사에서 지금의 하노대도에 출장소를 세웠다. 이곳에 활어보관소를 짓고, 1909년에는 매립공사를 한 후 이주자 가옥을 건설하여 구마모토현 어민들에게 임대했다. 또 종사자들을 위한 숙소와 사무실을 마련하여 새로운 이주촌이 형성되었다. 일본인들은 인근 해역에서 어획한 수산물을 구매해서 집하했다가 동력선으로 부산이나 시모노세키로 보냈다. 부산수산회사는 동력선을 20척이나 운영했다. 

일본인들은 노대도를 시키시마무라(敷島村)이라고 불렀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골드러쉬'처럼, 일제강점기 떠오르는 신흥시장을 부도촌(敷島村), 또는 부도정(敷島町)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만성적 물 부족으로 거주환경이 열악한 지금의 노대도를 상상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지난 1919년 야마구찌 야스타로(山口安太郞)가 욕지도 부근 해역에서 고등어박망(鯖縛網)으로 높은 어획고를 올리면서 매년 고등어 어업자가 증가하였고, 이후 욕지도는 고등어 어업의 근거지로 성장했다. 박망(縛網)은 일본 에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전갱이, 고등어, 가다랑어, 참치류 등 활발하게 유영하는 어군을 빠르게 감아 어획하는 어법이다.

일제 강점기 이주어촌에 대하여 김수희의 연구('일제시대 고등어 어업과 일본인 이주어촌', 2005)에 따르면 1905년 고등어 어장을 중심으로 일본인 집단이주 어촌이 형성되면서 일본인 어민이 고등어를 일본으로 유통하는 어업구조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후 일본인 어업 자본가가 진출하면서 동력선이 도입되고 일본인 이주자가 한국인을 노동자로 고용하게 되었는데, 일제시대 전체 고등어어획고의 90% 이상이 일본인이 어획한 것으로 거의 일본으로 운송되었다고 한다. 욕지도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당시 조선인 어부들의 평균 월급은 15엔이었으며, 대부분 욕지도 동항리와 서산리 주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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