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과 남원부사 어떤 인연이 있기에
창원과 남원부사 어떤 인연이 있기에
  • 송종복
  • 승인 2017.11.20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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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 (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필자가 1982년도에 쓴 논문 중에 <수령직의 교체실태에 관한 일고>를 보면 창원부사 191명에 대해 교체실태를 분석했다. 창원부사와 남원부사의 교체에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중 장의국(張義國)은 선조 20년(1582ㆍ8)에 남원부사로 부임했다. 그는 남원부사 재임시절에 누원(屢苑) 근처 요천강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누(樓) 앞에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를 만들었고, 그 위에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담긴 ‘오작교(烏鵲橋)’를 축조했다. 그다음 임지는 1587년 7월에 창원부사로 부임했다.

 부사의 재직기간은 2년 6개월인데 장의국 창원부사는 5년 11개월이나 재임했다. 그리고 보니 창원부사 191명 중에 제일 오랫동안 선정을 했다는 증거다. 역사는 ‘아이로니컬’ 하게도 장이국이 남원부사 재임 시에 보수한 광한루 앞 ‘호수’와 ‘오작교’를 무대로 한 <성춘향전>의 주인공이 이도령(성이성)이다. 그의 부친은 창녕에 살다가 영주시로 이사했다. 선조 40년(1607)에 부친 성안의(成安義)가 남원부사로 부임할 때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그곳에서 춘향이를 만났다.


 한창 이성에 눈뜰 때라, 이 ‘호수’와 ‘오작교’에서 춘향과 ‘로맨스’를 즐겼다. 이때 이도령(성이성)과 춘향이를 소재로 한 ‘춘향전’은 희극, 인형극, 판소리, 만담 등으로 확산됐는데, 이는 양반자제의 ‘스캔들’이라 해 금지하게 했다. 이로써 성몽룡을 이몽룡으로 바꾸고, 성(姓)이 없던 기생 춘향에게 성씨(成氏) 성을 붙인 것이다.

 이도령(성이성)은 그 후 문과에 급제해 1637년에 남원부사로 부임했다. 그는 청춘 시절 이곳에서 보낸 ‘로맨스’와 ‘스캔들’에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임기를 마치고 다음 부임지는 뜻밖에 청춘 시절 ‘로맨스’의 장소를 만들어 준 장의국의 발자취를 따라 효종 4년(1653)에 창원부사로 올 줄이야 꿈엔들 알았을까. 이도령(성이성)이 창원부사로 부임하자(효종 4년) 노비추세(奴婢推刷)의 선정을 베풀었다. 즉 부역이나 병력을 기피한 사람, 또는 상전(上典)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고 다른 지방에 몸을 피해 간 노비 등을 전부 찾아내어 본 고장에 돌려보내는 일과 백성들이 진 빚을 모두 탕감해 줬다. 이로써 이도령(성이성)이 창원부사 시절의 선정으로 청백리에 녹선(錄選) 됐다.

 이도령(성이성)은 부사경력을 보면 1637년에 남원부사에, 1639년 합천현감에, 1653년 창원부사에, 1655년 진주목사에, 1660년 강계부사에 부임했다. 그 중 합천현감 재임 중에는 청렴 공직으로 갓난아기 어루만지듯 백성을 돌봤으며 봉록을 털어서 전임자가 체납한 관곡 수 백석을 대신 충당한 사실도 있었다. 진주목사 재임 때는 선치해 ‘표리’(表裏: 왕이 하사한 옷감)를 받았고, 창원부사 재임 때는 선정해 ‘청백리’로 채록됐고, 강계부사 재임 때는 어려운 부민들에게 삼세(蔘稅)를 면제해 주어 ‘관서활불(關西活佛)’이란 칭호도 받았다. 그 외 암행어사 시절에는 세금을 과다 징수한 진천현감과 생일날 과다한 잔치로 국법을 어긴 석성현감을 적발해 파직시키기도 했다.

 이 외 나만엽(羅萬葉)이 현종 2년(1661)때 남원부사로 부임해 임무를 다하고는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복귀했다가 현종 15년(1674) 때 창원부사로 부임한 적도 있었다. 이같이 남원부에는 ‘로맨틱’한 일화가 있으며, 창원부에는 선정으로 ‘청백리’가 된 적이 있다. 따라서 창원의 부사 장의국은 ‘춘향전’을 배태시켰다는 열녀의 원조임을 상징하는 조각상의 표징이 있었으면 한다. 또 창원의 부사 성이성(이도령)도 청백리에 채록됐기에 청렴결백한 이도령(성이성)의 청백리 동상을 세워 이곳 공무원들에게 표징으로 삼았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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