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해군사관학교 영관급 장교들이 여군 부사관을 성추행한 혐의로 조사 중인 것이 드러나 우리 사회에 무거운 경종을 울렸다. 무엇보다 규율이 중요시되는 군대에서 갑을 관계를 악용해 성범죄가 저질러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뿐 더러 낯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런 비슷한 일이 알게 모르게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10월에는 사단장이 성추행하는 사건도 있었다. 사단장이 부하 여군을 성추행한 혐의로 긴급체포된 것이다. 이 여군이 전에도 다른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어 더 충격적이다. 사단장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부하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저버리고 다섯 차례나 성추행을 했다. 이미 마음의 상처를 입은 여군에게 사단장으로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짓을 한 것이다. 이 사건 직후 한민구 국방장관은 서둘러 지휘관 회의를 열고 군기를 강조했지만 예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
상식을 깨고 권력을 이용한 성범죄가 일어나는 것은 비단 군대뿐만이 아니다. 지난 4일 서울대의 한 교수가 제자를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여 지식의 금자탑을 쌓고 있는 서울대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개탄스럽다. 사건 피해자 대책위에 따르면 22명의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상대로 10년 동안이나 범죄가 이어졌다. 이 교수는 학생들을 저녁식사 자리로 불러내 술을 권하면서 신체접촉을 시도하고 연구실로 불러 성추행도 했다고 한다. 학생이 이를 거부하면 오히려 화를 냈다. 절대적 갑의 위치에 있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쓴 것이다.
최근에는 전직 국회의장도 골프를 치던 도중 여성 경기보조원(캐디)의 가슴을 만지는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됐다. 이 밖에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전ㆍ현직 검찰 고위직의 성추행 사건이 여럿 남아 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권력형 성범죄로 불리는 사건이 늘어나면서 권력을 악용해 욕망을 채운 이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가진 잘못된 사고 방식을 엿볼 수 있다. 갑과 을의 비합리적인 권력관계가 사회 깊숙이 뿌리 박혀 있다. 그 이면에는 갑을 관계를 주종 관계에 가깝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고 이는 기본적으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인격의 영역마저 침범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가치관이 법의 테두리마저 무너뜨리는 행동을 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심리에 작용하는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탓해야하는 것은 물론이나 어떤 위계질서나 거래관계도 사람 위에 있을 수 없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있는 우리 사회 풍토가 더 문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정부가 그동안 내놓은 성범죄 대책은 주로 길거리 등에서 반사회적 일탈자들에게 촛점이 맞춰져왔다. 권력형 성범죄는 사실상 그동안 방치돼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적으로 성공과 출세를 선망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했다. 권력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자에게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피해자를 두번 죽이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된다. 정부 차원에서 제도를 보완해 처벌이 강화돼야함은 물론이고 이에 앞서 갑에게 을의 입장을 이해시키는 의식 개혁이 선행되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조직을 지나치게 감싸는 온정주의에 젖어있다. 서울대는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자 서둘러 문제되는 교수의 사표를 수리해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해군사관학교도 조사가 완료되기 전에 해당 영관급 장교를 다른 부대로 전출시켰다. 사회에 퍼져있는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잡고 상식선에서 일을 처리하기 보다는 이를 은폐하고 감싸기 바빴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우리는 온정주의에 빠져서 잘못된 인식을 고치지지도 고쳐볼 노력도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잘못을 되풀이 할 수는 없다. 나무가 뿌리까지 썩었다. 지금처럼 잔가지 몇 개를 쳐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갑의 사고방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갑이 베푸는 이해와 배려가 우리 사회를 상식으로 이끌 것이다. 나아가 이런 의식이 성장해 개인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를 아울러 이해하고 이끄는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