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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통일절<101>
제11화 통일절<101>
  • 오뉴벨
  • 승인 2012.08.2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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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미친사랑(9)
▲ 일러스트 김 순 기자
풀잎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고…

“제가 풀잎 학생과 그런 미친 듯 세월을 보낸 건 거의 석 달이나 되었죠. 그 동안 가게엔 ‘내부 수리 중’이란 팻말을 내걸고 휴업까지 하면서 말예요.”

시나리오 작가 임 강의 잔에 다시 들쭉술을 따르며 이젠 담담한 어조로 문희정이 독백처럼 말했다.

“으음! 설마 나처럼 시나리오를 쓰는 건 아니겠죠?”

“호호호. 시나리오는 아무나 쓰나요? 그 후 우린 심지어 ‘아담과 이브’ 놀이에도 빠졌어요. 그런 후유증은 기어이 제게 나타났구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그때 박종철 사건으로 대통령 직선제라는 카드가 꺼내졌고, 세상이 갑자기 잠잠해지자, 어느 날 풀잎은 온다간단 말도 없이 사라졌다구요.”

“그들의 목적한 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제게는 그때부터 문제가 생겼죠. 바로 풀잎이 말한 대로 제 뱃속에…….”

“엣? 그게 정말이요?”

“20년 전 제 아이를 빼앗긴 후 또다시 임신이라니, 물론 너무나 황당했죠. 그래서 지울까도 고민하다가 이번만큼은 내 아이로 키우고 싶어 결국 출산했는데…….”

바로 그 무렵 그녀는 교도소에 수감된 풀잎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녀는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이제 저에게 조국의 자유와 정의의 존재는 누나가 돼버렸죠. 권좌의 사람들이 저희를 미쳤다고 했듯이 저도 누나에게 미쳤으니까요. 하지만 후회는 않습니다. 전 지금도 누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거든요. 근데 누난 저로부터 하늘나라로 떠나버리셨나요? 우리 사이엔 셋은 커녕 하나도 없잖아요?’

그 순간 갑자기 뱃속에서 힘차게 발길질하는 아가의 장난을 진정시키며, 그녀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끝내 저는 풀잎에게 면회를 가지 않았죠.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서요.”

“왜요? 20년 연상인 남자의 아이는 낳을 수 있었어도, 그 반대 연하의 아이는 안 된다는 도덕적 문제 때문에?”

“아뇨! 그가 떠나기 전 자신의 신상에 대한 고백을 들었을 때 설마 했던 사실이 점점 더…….”

이제 문희정은 혼자인 듯 독백처럼 중얼거리며 자작으로 들쭉술을 따라 한 입에 쏟아 부었다.

“아니! 그럼?”

더 이상 캐묻지 못하는 임 강에게 그녀가 말문을 이어갔다.

“각하의 수하였던 풀잎의 아버지! 그러나 밝혀진 출생의 비밀로 그는 방황하게 됐고, 그때 군부 독재하의 이 나라 자유와 정의가 그를 구원하는 도피처가 돼주었던 거죠.”

‘아!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자기 아들의 아들을 낳다니……!’

순간 임 강은 너무도 충격적인 그녀의 비극에 아연실색할 뿐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그녀가 쓰러지듯 탁자에 머리를 부딪치며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흐흐흑. 전 그때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었어요.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면 생목숨을 끊을 수 없었고, 아기 아빠를 떠올리면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거든요. 흑흑흑.”

하지만 그 순간, 시나리오 작가 임 강은 그녀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꺼내지 못했다. 술병에 남은 들쭉술만 바닥이 날 때까지 축낼 뿐이었다. 바로 이때 <금강산 쉼터>의 출입문이 활짝 열리면서 훤칠한 소년, 아니 준수한 청년이 나타나 마치 외국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소리쳤다.

“맘! 아들 데니 문이 왔어요. 아이 러뷰!”

“오, 데니야! 어서와! 엄마가 기다렸단다.”

순간적으로 눈물을 씻은 문희정이 깜짝 반기며 그녀의 아들을 향해 뛰쳐나가자, 임 강도 얼른 따라 일어서며 그녀에게 말했다.

“난 다음에 또 오죠! 근데 아들도 희정씨를 닮아 배우 같군요?”

그의 농담, 아니 진담에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조기 유학중인데 방학이 돼서 귀국한 거예요. 임 작가님! 그럼 담에 봐요.”

다음 순간 그녀와 데니 문이 마치 연인들처럼 얼싸안고 방방 뜨는 걸 훔쳐보며, 임 강은 조용히 <금강산 쉼터>의 출입문을 열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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