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8:10 (토)
“상처보다 돈으로 사고파는 상이용사가 더욱 괴롭다”
“상처보다 돈으로 사고파는 상이용사가 더욱 괴롭다”
  • 승인 2006.06.22 0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25 참전 유임원 옹 “정당한 예우·보상 이뤄져야”
“전쟁에서 병신이 된 것도 억울한데 돈으로 상이군인을 사야 합니까”
내일 모레면 6.25이다.
6.25발발 5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그 당시를 반추하며 울분과 회한으로 고뇌하는 노병이 있다.
전쟁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기로에 섰던 전쟁초기부터 종전 직전까지 적과 싸우다 끝내는 화상을 입고 제대는 했으나 아직도 그 때 입은 상처와 깊은 전쟁의 상흔은 삶의 길목에서 노병을 옥죄는 자국으로 남았다.
“참 그 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왔나 모르겠다” “야맹증으로 밤에는 꼼짝도 못하는데다 키가 150cm밖에 안돼 몇번에 걸친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하길래 영영 군에 못가는 줄 알았지” 그래서 지역방위대 하사관으로 근무하다 결국 징집됐다는 유임원(사진.77.거제시 거제면 동상리)옹.
유 옹은 한창 전쟁이 치열하던 50년 9월27일 부산 구포에서 일주일 교육 후 ‘K144060’ 군번을 받고 전선에 배치됐다.
그 때가 만18세, 장남이던 유 옹은 부모님과 남동생, 결혼한 아내와 2개월이 채 안된 딸을 두고 입대해 미8군 24사단 박격포중대에 배치돼 4.2인치 포대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낙동강전선에서부터 인민군을 쫓아 북으로 진군했다.
그해 11월쯤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격한 부대는 중공군과 맞닥뜨렸고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결국 후퇴했다.
52년에 한국군 11사단에 다시 배속된 유 옹은 강원도 묵호 인근 금봉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때 남에서 퇴각하던 인민군을 후방에서 만나 포위된다.
일주일동안 밤낮없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불붙은 물체가 날아와 얼굴을 덮쳤다.
깨어났을 때는 감싸진 얼굴을 제외하곤 머리, 목, 손과 팔에 엄청난 화상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적과 조우하는 상황에서 후송이 되지못한 채 사흘을 방치하다시피 해 있다가 방한복 회수를 위해 도착한 트럭을 타고 묵호로 후송됐다.
결국 휴전을 1개월 정도 앞두고 전역은 했으나 양쪽 손 엄지와 검지사이가 붙어버렸고 온 몸과 특히 목은 소나무껍질처럼 화상의 흔적이 깊게 남았다.
전장에서 바로 옆에 있던 한동네 친구들이 쓰러져 가는 것을 보면서 살아온 것만도 다행으로 자위하며 풍전등화의 기로에서 조국을 구하는 일익을 담당했다는 자부심으로 버텨왔다.
상이군인에게 주는 정부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그동안 두번의 뇌수술로 이젠 병마의 고비를 맞고 있는 유 옹은 매년 찾아오는 6.25의 단어조차 부담스럽기만 하다.
종전 후 신체검사 통지서를 받고 진해 모병원에서 검진을 받는데 내놓고 돈을 요구하는 군의관에게 “전쟁에서 병신이 된 것도 억울한데 돈으로 상이군인을 사야 된다면 혜택을 못 받아도 좋다”며 “다투고 돌아선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며 “차라리 참고 빚을 내서라도 혜택의 대상이 됐다면 자녀들 교육이라도 시켰을 것”이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붙어버린 손가락 때문에 삯일 한번 할 수 없이 가난과 싸우면서 처절한 제2인생을 살아온 유임원옹, 늦었지만 보훈청이 발굴해 당연히 국가가 베푸는 상이용사의 정당한 보상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여 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