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20:50 (토)
조선시대 한글편지서 애한·하소연 읽다
조선시대 한글편지서 애한·하소연 읽다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3.21 2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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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넘기기 ⑩
노경자의 '일백 권에 쓴다 한들'
귀양 추사, 아내에게 서신 보내
절제된 사랑과 멋·아픔 전해
선현 의사소통 방식 등 엿보기
노경자의 책 '일백 권에 쓴다 한들' 표지.
노경자의 책 '일백 권에 쓴다 한들' 표지.

오늘날은 마음을 진득하게 전할 수가 없다. 할 말이 많은데 외롭다. 손편지를 쓴다고 해도 누군가 내 편지를 살뜰히 읽어 줄 사람이 있을까? 디지털 세상이지만 아날로그를 꿈꾼다. 빠른 세상에서 느린 손편지가 오고 간다면, 상상만으로도 훈훈하다.

편지는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쓰는 이가 받는 이에게 자기 의사를 직접 전달하는 수단이다. 이 책을 통해서 당대 언어생활의 생생한 모습과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감정 및 정서를 느껴 봤으면 한다. 조선시대의 살아 있는 삶의 현장을 대면하는 것 같다. 그럼 조선시대 한글편지 속으로 들어가 보자.

조선시대 한글편지 에세이집인 '일백 권에 쓴다 한들'에 나와 있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서 귀양살이하는 중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여기에 소개한다.

오늘 집에서 보낸 서신과 선물을 받았소, 당신이 봄날 내내 바느질했을 시원한 여름옷은 겨울에야 도착했고, 나는 당신의 마음을 걸치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 서성이다가 머리맡에 병풍처럼 둘러놓았소. 당신이 먹지 않고 어렵게 구했을 귀한 반찬들은 곰팡이가 슬고 슬어 당신의 고운 이마를 떠올리게 하였소. 내 마음은 썩지 않는 당신 정성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워 집 앞 붉은 동백 아래 거름 되라고 묻어주었소. 동백이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 눈자위처럼 많이 울어서일 것이오. 내 마음에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고, 문을 열고 어둠 속을 바라보았고, 바다가 마당으로 몰려들어 나를 위로하려 하오. 섬에는 섬의 노래가 있소. 내일을 잘 휘어진 노송 한 그루 만나러 가난한 산책을 오래도록 즐기려 하오. 바람이 차오. 건강 조심하오. -'추사가, 김정희(남편)→ 예안이씨(아내)'

그의 편지는 아내가 읽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내가 죽은 줄도 몰랐던 추사는 뒤늦게야 아내의 죽음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귀양살이에서의 오는 외로움과 아내에 대한 고마움, 그리움, 인간적인 사랑이 오롯이 편지 속에 나타나 있다. 이 편지 속에서 절제된 사랑과 멋스러움이 아픔으로 전해져 온다.

노경자 작가는 이 책에서 '조선시대 한글편지는 당시 여성들의 가정생활에서 느끼는 정한과 그와 관련된 생활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부모의 품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란 여성이 어느 날 고향과 부모·형제를 떠나 낯선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낯선 고장, 낯선 사람들이 이제부터 가족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하기만 한 시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수단이 친정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편지다'고 했다.

한글편지를 읽다 보면 당시의 역사와 문화, 결혼생활, 성리학이 정착하면서 점점 더 여성에게 불리해지는 생활이 포착된다. 여성은 재혼 금지에, 이혼을 신청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여성들의 삶은 팍팍해졌고, 남성 위주의 생활이 점점 정착돼 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편지 속에는 단순한 안부 정도가 아니라 현실 밀착형 글들이 많아서 전반적인 당대의 사회문화를 읽어 낼 수도 있다.

'조선시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사회활동이 제한됐고 법률행위는 남편이나 가장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여성은 혼인해도 남편 쪽의 족보에 본인의 성만이 기재될 뿐 본인의 이름이 없었다. 게다가 친정의 족보에도 여성의 이름은 올리지 않고 혼인한 여성의 남편, 즉 사위의 성명을 기재했다. 여성에게 성은 있되 이름이 없었던 것은 여성이 사회적 활동 및 법률적 행위를 단독으로 행할 수 없도록 규제한 시대적 조건의 결과였다. 전해져 오는 당시 한글편지에도 시집간 딸의 집으로 편지를 보낼 때 사위의 성을 기재하거나 딸의 소생인 아이들의 이름을 붙여 'ㅇㅇ어미에게'라고 기재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정과 가문에서 결정한 남성과 결혼해 평생을 살아가야만 했다. 특히 왕실의 혼례는 간택을 통해 이뤄지는데 총 3차에 걸쳐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다음은 조선시대 역사상 두 번이나 수렴청정을 한 순원왕후가 쓴 편지다.

간택 단자가 이십여 장 들어왔는데, 제왕가의 배필이 응당 정한 사람이 있겠지만 지금부터 마음이 동동하기 이를 것 없는 것이 처자는 눈으로 보니 알겠지만 사돈 재목이 어려운 것이 문학이나 있고 심지나 중후하고 상감을 잘 도와드릴 재목이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그 속을 알 길이 없으니 이 생각을 하면 속이 갑갑하네. 내 뜻이 우리 김 씨와는 (혼례를) 아니 하고자 하는데 두 명의 왕후와 두 명의 부마가 분수에 과한 것이 두려워 싫은 일이로세. (…) 내 생각은 이번은 노론, 소론을 가리지 말고 (혼례를) 하고자 하니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순원봉서33-1, 순원왕후→김홍근(재종동생)'

'왕실의 혼인은 그 가문의 특정 인물이 당대 왕이나 황실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므로 왕실 혼례는 세력의 확충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우선됐다'고 노 작가는 밝히고 있다.

이 책 조선시대 한글편지 속에는 사랑과 애한, 하소연을 담은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와 왕실 이야기가 담겨 있다. 노 작가는 2008년 가을 대학원에서 흘림체로 쓰인 한글편지 판독문을 처음 접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한다고 '마중글'에서 밝히고 있다. '수백 편의 편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조선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교유했는지 궁금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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