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사람은 술 퍼
노을처럼 마음 놓을 자리도 없는 사람은
노을처럼 마음 놓을 자리도 없이 술 퍼
그러다 그러다 어두워지면
깊은 어둠같이 어두워지며 술 퍼
늘 슬픈 사람은 늘 술 퍼
노을처럼 어두워지며 술 퍼
말할 수 있는 슬픔은
이미 슬픔이 아니라고
주절거리며 술 퍼
노을처럼
붉게 퍼질러 앉아
슬픈 얼굴로 술 퍼
나중에는 노을보다 더 노을이 져서
술 푸는 것도 잊고 슬퍼
나중엔 정말 나중엔
슬픔도 목말라 술 퍼
술이 어둠보다 더 어두워져서
어둠도 어둠을 몰라볼 때까지
슬픔을 잊고 술 퍼.
시인 약력
- 경남 창녕 출생.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 시집 『햇빛거울장난』 『네가 청둥오리였을 때 나는 무엇이었을까』 『파랑은 어디서 왔나』 『봄, 풋가지行』 『민화』 외 다수.
현 마산문학관 운영위원장, 시문학연구회 하로동선 대표. 경남문인협회, 마산문인협회 이사.
- 고산문학대상, 산해원문화상, 경남문학상, 월하지역문학상, 마산시문화상, 마산문학상 등 수상
☞ 고춧가루물 같은 노을을 자꾸 퍼마시다 보면 슬퍼서 우는 건지 매워서 우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술이란 게 그렇다 슬퍼서 마시면 잔은 비워지는데 슬픔은 더 마음의 잔을 가득 채워간다. 그래서 술에 취하기보다 슬픔에 먼저 취한다. 술도 마시지 않고 슬픔에 취해 본 사람은 홀로움의 깊이를 안다. 그렇지만 술이라는 핑계는 슬픔을 잠깐 잊게 하는 처방전이다. 어떤 빛깔의 술을 마셔도 온몸이 붉어지기만 하는 것은 슬픔은 핏속에 깊이 녹아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 임창연(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