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5:29 (토)
당신이 힘들까 향기 못 뿜는 심정
당신이 힘들까 향기 못 뿜는 심정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3.20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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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통해 삶을 묻다 ⑫

나희덕 시인 '찬비 내리고'
행복이 상대에게 박탈감 주고
주변 침울할 때 괜히 미안
상대 헤아리고 상처 안 줘야

나희덕 시인

꽃이 질까 봐서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는가? 무심히 내리는 봄비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잠을 설친 적이 있다. 그 연약한 꽃잎이 비에 다 져버릴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겨우 추운 겨울을 보내고 빼꼼 내민 꽃잎 위에 떨어진 비는 가혹하게 느껴졌다.

봄을 알리는 매화가 피고 나면 봄비가 잦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핀 꽃이 봄의 향기를 알릴 즈음 봄비는 영락없이 내린다. 꽃 핀 뒤에 바로 내리는 봄비는 원망스럽다. 아무런 이성적 논리도 없이 꽃이 아플까 봐 원망스러웠다.

가끔 기쁘고 축하받을 일이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살핀 적이 있는가? 주변이 침울하면 괜히 미안하고 죄스러울 때가 있다. 반대의 일도 있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진작 가족들에게 말을 못 할 때가 있다. 아픈 마음을 전하면 나보다 더 힘들어할까 걱정할까 봐서 조용히 마음으로 삭이는 일도 있다.

나희덕의 시 '찬비 내리고'를 읽다 보면 시적 화자의 깊은 마음이 아리게 다가온다. 어떻게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는지'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당신이 아플까 봐서다.

요즘 SNS를 통해서 행복 전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누가 행복한가 내기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sns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절제하는 것이다. 나 좀 봐달라고 마음껏 소리칠 수 있지만 나와 다른 상황의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상처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여행을 다녀오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나만 보기'로 설정해서 기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들에게 비교의 마음을 주기 싫다고 했다. 그리고 남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비교의 늪으로 빠져들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나만의 행복했던 순간을 기록하는 글들이 때로는 타인에게 아픔을 준다. 행복한 순간들은 매 순간 오지 않고 아주 가끔 온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의 일상의 기록들을 보며 혼자 우울의 늪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는 얼마나 도를 닦아야 '당신이 힘드실까 봐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을까?'

찬비 내리고

-편지 1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나희덕의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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