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뒤크 데 자르의 갤러리 89'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추모전
여성 작가 활동 및 해외 진출 지원 전시
19세기 철길 따라 재탄생한 예술 공간
예술가 열정 담긴 50여 개 아틀리에
새로운 출발에는 용기가 따른다. 과거를 뒤로한 채 미래를 향한 도약을 준비하는 여정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한다. 그래서 떠남과 도착이 교차하는 기차 길목에는 언제나 꿈꾸는 사람들의 온기가 새어 나온다.
파리 12구 리옹 역을 떠나 바스티유 광장을 향해 천천히 걷다 보면, 아치형 건물 안으로 예술가들의 손길이 느껴진다. 19세기 고가다리 아래 자리한 아틀리에 거리 비아뒤크 데 자르(Viaduc des Arts)다. 버려진 철길을 재탄생시킨 이 예술 공간은 지난 1994년 새로이 문을 연 이래 연중 내내 창작 정신의 꽃을 피우는 예술가들을 맞이하고 있다. 과거가 깃든 기찻길을 따라 산책로 위에는 현재 약 50여 개의 예술상점이 길게 늘어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빼곡히 들어선 예술상점들 사이에서 그리운 한국의 향이 느껴진다. 비아뒤크 데 자르에 위치한 갤러리 89(Galerie 89)이다. 이 갤러리는 지난달 24일부터 4월 5일까지 '한국여성작가 회화공모전 & 200K-Women in Paris'를 선보인다. 여성신문(Women's News), 문화체육관광부,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의 후원 아래 공동으로 주최된 이번 전시는 총 4차례에 걸쳐 한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 200점을 소개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로 2번째를 맞이하는 기획전시는 1월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의 한 차례 전시 이후, 한 달간 파리에서 순회전의 일환으로 전개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하는 갤러리 89(관장 안은희)는 2007년 개관 이후 한국미술을 전문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한국 예술가들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 여성 작가의 작품만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한국 작가 나혜석을 추모하는 기획 의도를 담았다. 1896년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나혜석 작가는 한국 서양 유화의 선구자이자 한국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개인 전시를 연 화가다. 한민족과 여성의 수난의 시대였던 일제강점기, 그는 극단적 남성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목소리를 내며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작가는 계약 결혼, 불륜, 이혼고백서 등 숱한 스캔들을 불러일으키며, 회화를 비롯한 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신여성'이었다. 억압적인 사회를 비판하고 신여성 계몽운동을 주도한 그 모습은 오늘날 한국 1세대 페미니스트의 선구로 여겨진다.
나혜석 작가와 파리의 인연은 깊다. 1920년대 말 당시 외교관이었던 남편을 따라 떠난 1년 8개월 간 유럽 일주를 계기로 1927년 작가는 처음으로 파리에 발을 들였다. 사실적인 인물화와 풍경화를 주로 그리던 그에게 약 8개월간의 파리 생활은 자신의 새로운 예술 지평을 여는 계기였다. 당시 파리는 강하고 자유로운 색채 표현이 특징인 피카소, 마티스 등의 야수파 거장들이 군림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여성 또한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있던 자유로운 창작 환경은 그의 작품 활동 전환점을 제공했다. 자국을 떠나 이국에서 새로운 꿈을 그려 나가던 그의 열정은 당시 그가 남긴 파리 유학 시절 회고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는 많은 여성 작가들이 활약하고 있다. 다만 그 작품이 해외에서 전시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번 전시는 한국 여성 작가들의 해외 진출을 응원하고 지원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모든 작품은 작가의 경력보다는 작품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기준으로 선정됐다. 이미 해외에서 알려진 작가에 주목하지 않고, 한국 내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해외에 소개된 적이 없는 여성 작가들에 초점을 맞췄다.
갤러리 1층과 지하 공간에서는 현시대 한국 여성 작가들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반영하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숲, 꽃, 동물 등 한국의 자연을 담은 풍경화로부터, 불교, 전통 문양 등 한국적인 색채를 띠는 현대적인 작품까지 다양한 작품 세계가 한 곳에 모여있다. 서로 다른 주제와 소재를 담은 작품들이지만, 한국을 떠나 미지의 세계를 향해 새로운 예술의 꽃을 피우고자 하는 그 뜻만큼은 하나다.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나혜석의 소설 '경희'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여성으로서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한 명의 예술가로서 당당하게 인정받고자 했던 그의 삶, 그의 창작 정신을 따라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들의 열정이 파리를 사로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