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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 탁본. 쌍구가묵본의 진실
광개토태왕릉비 탁본. 쌍구가묵본의 진실
  • 경남매일
  • 승인 2024.03.1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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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스님
도명스님

고구려의 중흥 군주 광개토태왕의 훈적을 기록한 능비는 서기 414년에 아들 장수왕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1460여 년의 시간이 지난 1876년 청나라 사람 관월산에 의해 다시 발견됐다. 당시 일본육군 참모본부는 1880년부터 여러 명의 밀정을 청에 파견해 정세를 염탐했는데 그중 20대의 젊은 무관 사카와 가게아키는 만주에 잠입해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 1883년 이 비에 대한 소식을 듣고 비가 있는 집안(集安)으로 가 탁본을 입수하여 다음 해 참모본부로 가지고 갔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진 사카와와 탁본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다.

그가 일본으로 가져간 탁본을 이름하여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라 한다. 이 탁본의 채탁 방식은 비면에 종이를 대어 먹이나 연필로 글자의 윤곽선을 그린 다음 글자 이외의 여백에 먹을 채워 넣는 기법이다. 사카와가 탁본을 일본으로 가져간 시기는 1884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탁본 시기는 그가 탁본을 입수한 1883년 또는 그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 어쨌든 사카와본은 현존하는 모든 탁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탁본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광개토태왕릉비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故 다께다 유끼오 동경대 교수는 쌍구가묵본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사카와가 가져온 탁본은 엄밀히 말해 쌍구가묵본이 아니라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라고 했다. 묵수곽전본이란 기존의 탁본 위에 종이를 대어 글자의 윤곽선을 그리고 나머지 여백은 먹으로 채우는 방식이다. 둘 다 비슷한 방식이나 하나는 비에 바로 종이를 대어 그리는 직접 방식이고 하나는 기존 탁본 위에 종이를 대어 그리는 간접 방식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다께다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사카와가 가져온 탁본에는 종이를 비면에 댄 흔적이 없다고 한다. 이는 사실일 것이다. 왜냐면 그는 존경받는 도쿄대 교수였기에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쌍구가묵본을 쉽게 볼 수 있었고 그 누구보다 좋은 조건으로 연구할 수 있었다. 만약 사카와본이 쌍구가묵본이라면 종이를 비면에 밀착한 관계로 탁본된 종이의 뒷면에 무엇이 묻었든지 아니면 아주 작은 훼손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탁본은 깨끗했다. 다께다 교수의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사카와가 가져온 탁본 이전에 그것의 모본(模本)이 되는 또 다른 탁본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만약 사카와가 집안에서 석회가 칠해지기 전의 어떤 탁본을 모본으로 묵수곽전본을 만들었다면 그 탁본이야말로 진정한 원석탁본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사카와본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전까지는 능비를 변조시키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편 사카와가 묵수곽전본을 구했다면 그 모본이 되는 원석탁본까지 함께 일본에 가지고 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갔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들에게 불리한 <을미년조>와 <병신년조> 원문이 그대로 있었기에 세상에 함부로 공표할 수도 없었다. 그 탁본이야말로 1급 기밀에 속하는 탁본이기에 일제는 이 원본을 세상의 그 누구도 찾지 못할 깊숙한 곳에 숨겼을 것이다. 그래야만 향후 그들이 행할 비문 변조의 악행이 영원히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들은 얼마간의 연구 끝에 <을미년조>와 <병신년조>를 비롯한 비의 원문을 일부 변조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변조된 부분만 다시 탁본해 변조된 탁본으로 묵수곽전본의 원문과 교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작업이 가능한 것은 사카와본은 한 장의 탁본이 아니라 30여 장의 탁본을 이어 붙인 것이었기에 변조가 필요한 부분의 탁본 낱장은 뗐다가 다시 붙이면 되었다. 그게 아니면 1884년 아예 낱장의 탁본을 일본에 가져갔다가 얼마 후 변조한 탁본 낱장까지 함께 조합해 1889년 세상에 공개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만약 사카와본 이전에 변조가 안 된 원석탁본이 세상에 있었다면 일제의 입장으로 보면 여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탁본의 수가 몇 부인지는 모르지만 일제의 입장에서는 비싼 값을 주고 사든지 아니면 훔치거나 뺏기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변조 이전의 모든 증거를 완전히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나라도 뺏을 수 있는 일본육군 참모본부가 개인이 소장한 탁본 정도를 확보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당시는 개인에게 현재와 같은 치안이 부재했고 첨단의 안전장치를 못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재밌는 사실은 1972년 재일사학자 이진희 교수가 일제의 '석회도부설'을 주장하기 전까지는 능비 연구자 대부분이 가짜 탁본인 사카와의 쌍구가묵본을 원석탁본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제가 던져준 변조된 탁본과 해석에만 매달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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