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6:17 (토)
광개토태왕릉비 변조의 해결방식과 결락자 □□
광개토태왕릉비 변조의 해결방식과 결락자 □□
  • 경남매일
  • 승인 2024.02.2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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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스님
도명스님

한민족 최고의 영웅이라는 광개토태왕은 그 이름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는 세 가지 정도이다. 첫째, 고구려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700년 역사의 왕조였지만 자국과 태왕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둘째, 그나마 그에 대한 행적이 기록된 능비조차 현재 중국 땅에 있고 동북공정으로 인해 적극적인 연구가 어렵다. 셋째, 과거 일제가 비문을 변조했는데 그 기조가 지금까지도 유지되어 올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문의 변조 시기는 일제의 스파이 사카와 중위가 쌍구가묵본을 일본에 가져간 1884년에서 요코이가 비문의 해석문을 공개한 1889년 사이 어느 때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수년간에 걸쳐 비문을 샅샅이 해부했고 <을미년조>와 <병신년조> 그리고 <경자년조>를 변조했다. 변조의 방법은 삭제와 가획 그리고 부분적 석회도부였다. 그들은 완전범죄를 꿈꿨다. 하지만 이제 진실을 규명하려는 눈 밝은 이들로 인해 숨겨졌던 만행이 차차 드러나고 있다.

대개 세상의 문제 해결 방식은 두 가지인데 핵심에서 지엽으로 가는 방식과 지엽에서 핵심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광개토태왕릉비의 변조를 해결하는 방식은 후자에 속한다. 왜냐면 영락 5년 <을미년조>의 '渡海破'와 결락된 □□ 부분을 해결하는 열쇠는 1년 뒤인 영락 6년 <병신년조> '討倭殘國'의 '倭'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倭'를 이전에는 대다수의 연구자가 '利' 또는 '科'로 보았다. 그러나 석회가 떨어져 나간 후인 1981년의 주운태 탁본 이후로는 모두가 '伐'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비문에 나오는 9개의 모든 '倭'자를 검토한 결과 현재 드러난 '伐'의 원래 글자는 '倭'가 분명했다.

능비의 비밀을 밝히는 네 곳의 포인트가 있다. 첫 번째는 '渡海破'이고 두 번째는 결락 된 '□□'이며 세 번째는 '討倭殘國'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포인트를 덧붙이자면 '軍至窠臼 攻取壹八城'(군지과구 공취일팔성)이다. 이 네 포인트는 원인과 결과로 서로 연결돼 있어 이를 규명하면 원래의 문장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영락 5년 <을미년조>의 변조 전 원문을 복원하면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 以辛卯年來渡 二破 百殘[倭侵]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倭殘國 軍至窠臼 攻取壹八城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었으며 전부터 조공을 왔다. 그러나 왜는 신묘년부터 물을 건너 (조공을) 왔다. 두 파렴치 백잔과 왜가 신라를 침공해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 때문에 영락 6년 병신년 태왕께서 몸소 수군을 이끌고 왜와 백잔을 토벌했다. 군이 왜의 소굴(窠臼)에 이르러 일팔성을 공격해 취했다' 사실 이 부분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뒤에서부터 인과관계를 규명해야 한다. 먼저 '군이 왜의 소굴에 이르러 일팔성을 공격해 취했다'는 결과는 앞에 나오는 병신년 '討倭殘國'의 구체적 설명이다. 또 '왜와 백잔을 토벌했다'는 이 결과는 그 앞의 '두 파렴치 백잔과 왜가 신라를 침공해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는 원인 때문이다. 그리고 '二破 百殘倭侵新羅 以爲臣民'이란 결과는 그 이전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이었고 조공왔는데, 왜는 신묘년부터 늦게 조공이나 온 나라'라는 게 원인이 된다.

한편 일제가 비를 변조한 목적은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渡 二破'를 '渡海破'로 변조해 왜가 고구려군에게 '토벌된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백잔과 □□ 그리고 신라를 '토벌한 주체'로 둔갑시켜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원래의 문장인 '百殘倭侵新羅'에서 나오는 '倭侵'처럼 □□ 부분에 '왜가 등장'하게 되면 그들이 원하는 임나(任那)를 □□에 넣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왜가 등장하게 되면 그들이 변조했던 문장에서 말한 것처럼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깨뜨린(渡海破) 주체는 왜가 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왜냐면 '渡海破'의 주어인 공격자 왜가 피해자인 백잔과 왜를 깨뜨려 주어와 목적어가 같아지는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백잔 뒤에 있었던 원래의 두 글자 '倭侵'을 아예 지웠던 것이다.

2017년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에서 주최한 추계 학술대회에서 당시 학회장이었던 이진오 교수는 기조발표에서 "합리와 물증을 중시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은 일본 제국주의가 가장 선호하는 방법론이었으며, 제국주의 침략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온 수단이었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과거 일제가 주로 쓴 치졸한 방법이 물증을 없애거나 변조시킨 후 "증거 내놔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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