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8:22 (토)
"히말라야 장엄한 아름다움 유지" 사진에 품다
"히말라야 장엄한 아름다움 유지" 사진에 품다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2.25 21: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해서 등반가 김재수 사진전
4년 5개월 등반기록·이알 후원
"운 더 남았는지 트래킹 지속"
첫 도전 에베레스트 성취·아픔 겪어
김재수 사진작가의 '산중의 왕 K2(8611m)'
김재수 사진작가의 '산중의 왕 K2(8611m)'

김재수 개인전이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 제1전시실에서 지난 20일에서 25일까지 열렸다.

김재수(61년생)는 사진작가가 아니라 히말라야 등반가이다. 그는 김해 사람이다. 김해 사람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다. 김해 출신이고 현재도 김해에 거주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사진은 등반가로서 4년 5개월 동안 찍은 사진이다. 사진 전시를 위해 사진을 찍은 것은 전혀 아니고 등반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지난 2007년에서 2011년까지 4년 5개월 동안 찍은 것이다. 사진을 찍는데 대략 28억 원이 들었다고 한다. 이 사진을 현상하고 전시하고 홍보하는 비용은 환경을 생각하고 이차전지를 생산하는 ㈜이알(대표 임현열)에서 아무 조건 없이 후원했다. 사진작품에 대한 수익은 김해시청에 일체 기부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히말라야의 아름다운 설경이 급속도로 녹아내리고 있어서, 그곳의 아름다움을 좀 더 오래도록 보고 싶다는 기획의도가 있다고 했다. 전시를 보면서 환경에 대한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사진 전시 기간이 짧아서 아쉬웠다. 김재수 등반가가 김해에 살고 있는데도 김해에서 주목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있었던 점 또한 아쉽다. 지난 23~24일 두 번 전시를 보고 김 등반가에게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김해의 자부심인 김재수 히말라야 등반가의 등반가로서의 활동과 정신세계, 몰입과 집념의 삶, 아픔 등을 묻고 답한 것을 서술한다.

90년대 초반, 김재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8천 미터 14좌를 완등할 유력 후보로 기대를 모았다.

1977년 17세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산행을 한데는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남부민 2동 산동네에 살았다. 거친 동네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거칠게 살 수밖에 없었다. 4살 위의 누나가 등산을 권유했다. 양산 산, 산행 1박 2일에서 텐트 바깥의 아침 운무의 멋진 광경이 펼쳐지는 것을 계속 볼 수 있다면 산행을 계속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질서하게 차려진 밥상-쌀밥, 찌개, 통조림 등-을 먹는 것이 좋았다. 이왕 산에 다니려고 한다면 전문적인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보수동 헌책방 골목 외국 클라이밍 관련 잡지를 500원을 주고 샀다. 그 책 속의 사진을 보면 가슴이 설렜다. 먼저 금정산 암벽등반 하기 시작했다. 군입대 전 5개월 동안 암벽등반 훈련 외는 외부생활을 하지 않았고, 훈련을 위해서 물지게를 지며 체력을 길렀다.

고소증을 극복을 위해 8개월 동안, 아침에 삼계에서 한림까지 뚝방길 20㎞ 뛰어서 심폐기능과 근지구력 길렀다.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 먹기 전에 다시 22㎞ 더 뛰었다. 하루에 마라톤 거리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뛴 것이다. 고소증을 극복하고 지치지 않는 몸을 만들었다. 그 결과 첫 도전에 바로 에베레스트를 첫 등반한 기록을 세운 성공한 사람이 됐다. 그러나 너무 쉽게 올라갔기 때문에 이상하게 자신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1번으로 끝내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해서 매년 등반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등반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산만 추구하다가 빈곤한 생활을 하기 싫어 지난 2002~2006년 5년간 사업에 집중했다. 어느새 가정과 사업이 안정되고, 사업 기금도 좀 생겼다. 이제껏 받은 도움을 환원하는 방법을 찾았다. 어려울 때 선배님들이 1~2만 원의 돈을 주기도 하고 생맥주고 사주던 선배들이 참 고마웠다. 그 보답을 후배들에게 돌려주자고 생각했다. 후배들은 경비가 없으니 무료이고 선배들은 돈을 내서 3억 6000만 원을 마련해서 20명이 히말라야로 떠났다. 후원을 받지 못해 2억 8000만원은 사비를 냈다. 20명이 가서 10명이 등정하는 획기적인 기록을 세웠다.

고미영 대장 매니저로 아픔 겪어

지난 2007년 합류했던 고미영 산악인이-코오롱스포츠-합류해서 14좌에 오르고 싶다고 했으나 처음에는 거절했다. 간곡히 부탁해서 나와 똑같이 한다면 합류하기로 했다. 같은 날 에베레스트 정상에 갔다. 고미영 대장은 나에게 매니저가 돼 줄 수 없느냐고 했다. 그때 거절했다. 여건이 못 된다고, 47세 나이로 힘들다고 했는데 고미영 대장은 상무에게 위성전화로 제 매니저 구했다고 했다고 한다. 내 꿈은 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꿈을 이뤄주겠다고 생각했다. 경비는 지원하나 소속으로서는 해주지 않고, 3번 더 등반을 했다.

2009년 본격적인 매니저 활동을 하던 중, 8000m 등반 고미영 대장과 10번째 등반에서 불과 봉우리 3개 남겨 놓고 행방불명의 사고가 발생했다. 파키스탄 낭가파르바트에서 고미영 대장이 사망한 것이다. 수색하기 힘들었다. 몇 번째 수색 중에 시신을 발견했고 진공 상태로 운반했다. 추락한 지점에서 불과 30m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가슴이 아프지만 잘 빚어진 도자기를 들고 오다가 그 도자기를 떨어뜨렸다. 그 도자기가 깨어졌다고 슬픔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고인 희망 3개 봉우리 등반

그때 불과 3개 남은 봉우리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했다. 나머지 3개 봉우리는 포기하고 싶었다. 지인들이 포기하는 것은 고미영 대장이 원하는 바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나머지 봉우리를 등반했다. 등반을 가장한 자살을 하자. 심정은 자살하고 싶은 심정으로 갔으나 14좌를 완정하게 됐다. 고미영 대장 추락사 이후 산을 포기할까 했으나, 고인의 희망이 남은 3개 봉우리를 마저 등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고인의 사진을 가지고 등반했다. 그곳에 카타를 걸고 기도하고 사진을 묻어두고 내려왔다.

더 많은 산 사진 찍고파

종교는 없다. 나를 관장하는 신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관장하는 신이 나를 여태껏 보호하고 위험을 피하게 해줬고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를 보호하는 신은 어떤 신인지는 알 수가 없고 모른다. 내가 가진 운이 어디까지인지도 모른다. 운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 알 수 없다. 운이 더 남았다고 생각하고 트래킹을 더 해보고 싶다. 앞으로 찍고 싶은 사진은 산과 어우러진 풍경, 발아래의 풍경을 담은 사진, 기이한 형태의 사진을 찍고 싶다. 첫 번째 목표는 등산이고 덤으로 사신을 찍는 것이다. 현재는 산과 살짝 멀어져 있다. 히말라야 트래킹은 매년 하려고 한다. 2년 후에 K2에 가보고 싶다. 예전에 하늘만 보고 다녀서 이제는 발아래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한다. 앞으로 등반가 김재수의 행보가 기대된다. 그의 등반과 등반 후의 사진을 기대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