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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⑩
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⑩
  • 경남매일
  • 승인 2024.02.2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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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김제홍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욕지도 자부랑개 심상소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은 한 반에 4~5명 정도 다녔다. 1942년경부터 일주일에 한 번, 교장이 재학생들을 직접 인솔해서 마을 뒷산 곤피라신사에 참배하고 헌금도 강제로 내게 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곤피라 신사(金比羅神社)는 군국주의를 떠받드는 의식의 장소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고, 욕지도의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까지 몸빼(もんぺ) 바지를 입고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전쟁 말기 자부랑개는 물론 하노대도 등에 미군기의 출현을 감시하기 위한 초소가 설치되었다. 산등성이의 초소에는 마을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깃대가 세워져 있었다. 흰색 깃발이 올라가면 적 비행기가 접근해 온다는 뜻으로 ‘쿠시케이호(空襲警報,くうしゅうけいほう)’라고 하고, 붉은색 깃발이 올라가면 ‘데키라이슈(敵機來襲,てっきらいしゅう)라고 했다. 적기가 내습한다는 붉은 깃발이 올라가면 집집마다 파놓은 방공호에 숨었는데, 보통 한 집에 서너 개의 굴을 파서 가족들이 한꺼번에 같은 굴로 들어가는 것은 피했다고 한다.

욕지면지(161쪽)에 의하면 태평양전쟁(1941~1945) 당시 자부랑개 뒷산 ‘호래이바우’ 남쪽 정상에 일본군 병력 1개 소대가 주둔한 감시소가 있었다고 한다. 1944년 미정찰기가 감시소의 일본군으로부터 대공화기로 선제공격을 받고 면사무소 근처와 다른 6개소에 미공군 폭격기의 폭탄투하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가 패망하고 욕지도의 일본인들은 선박을 이용해 조용히 떠나갔다. 이들이 무사히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떠나면서 다시 오고 싶다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그들은 멀지 않아 다시 욕지도에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십 년 전, 욕지도에 살았던 일본인 한 사람이 욕지도를 방문했다. 자부랑개에서 장어잡이를 했던 사람인데, 그는 일본으로 귀국했지만 여전히 한국 장어를 일본으로 수입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로 욕지도의 주민들의 기억을 더듬어 구술한 자료에는 한계가 있다. 일제 패망 이후 구술자들은 주로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광복까지로 볼 수 있다. 공통된 이야기는, 일본인들이 정착하면서 다른 지역보다 욕지도가 급속도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욕지도에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우편소, 상수도, 어업조합, 당구장, 목욕탕 등 그들이 필요한 편의시설이 설치되었다. 1930년대의 상수도 시설은 어쩌면 근대화의 상징이 될 수도 있겠다.

고등어 어업이 쇠퇴하면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일본인들의 흔적이 남은 건물들은 사라져갔다. 일본인들이 남긴 건물들을 보존하자고 주장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살던 곳의 흔적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며 그들의 기술과 장비, 금융, 문화는 욕지도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욕지도에 살아 일제 강점기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이중적이었을 것이다. 다른 곳보다 더 일찍 들어온 새로운 문물과 제도에 대한 배움도 있었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 어린 마지막 발악도 같이 보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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