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07:39 (일)
[한지현의 '안녕 프랑스'] 죽음·삶 공존, 떠난 자가 남은 자의 삶 묻다
[한지현의 '안녕 프랑스'] 죽음·삶 공존, 떠난 자가 남은 자의 삶 묻다
  • 한지현
  • 승인 2024.02.07 2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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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현의 '안녕 프랑스'
파리 20구 '페르 라셰즈 묘지'

7만 5000개의 묘지 안식처에 연간 350만 방문
세계적 예술 거장 잠든 문화 유산으로 받아들여
한국 현대미술 거장 이응노 화백도 영면 들어
피안과 차안 사이서 안식·성찰하는 고귀한 장소
줄지은 묘지들 사이로 뻗어지는 가로 수길.
줄지은 묘지들 사이로 뻗어지는 가로 수길.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지나간 삶이 헛되지 않아야만 그 이름이 오래 기억된다는 말이다. 사람은 떠나도 지난 시간은 떠나지 못한다. 추억이든 회한이든, 떠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 법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는 삶을 진지하게 돌아본다.

파리 20구, 높이 솟은 언덕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페르 라셰즈 묘지(Cimetiere du Pere-Lachaise)에 다다른다. 파리의 공동묘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에는 피아노의 시인 음악가 프레데릭 쇼팽, 사실주의 대문호 오노레 드 발자크, 민중을 이끄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프랑스의 대표 극작가 몰리에르 등 세계적인 예술의 거장들이 잠들어 있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은 지난 시간의 영예를 뒤로 한 채, 삶의 마지막 순간 영원한 안식처로 이곳을 선택했다. 약 7만 5000개의 묘지 중에는 한국 현대추상미술의 대가 이응노 화백의 묘지 또한 찾아볼 수 있다. 파리에서 왕성히 작품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89년 작고 후 이곳에 안장됐다.

방문객들이 두고간 꽃다발로 가득한 음악가 쇼팽의 묘지.
방문객들이 두고간 꽃다발로 가득한 음악가 쇼팽의 묘지.

'페르 라셰즈'라는 이름은 루이 14세의 고해 사제이자 예수회 수장이었던 프랑수아 덱스 드 라 셰즈 (Francois d'Aix de La Chaize) 신부에게서 유래했다. 라 셰즈 신부에 의해 운영되던 예수회 사제들의 요양지 '몽루이(Mont-Louis)'는 1762년 예수회가 프랑스에서 추방되면서 1804년 공동묘지로 다시 태어났다. 초기에 2000명 남짓의 고인이 매장됐던 이곳은 1817년 몰리에르, 라퐁텐 등 유명 인사들이 이장되면서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묘지가 됐다. 과거 산 자들의 안식처였던 공간이 오늘날 죽은 자들의 안식처가 된 셈이다.

민중을 이끄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묘지.
민중을 이끄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묘지.

페르 라셰즈 묘지에는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지난 시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알제리 전쟁, 르완다 집단학살 등 역사의 아픔을 기리는 추모비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묘지의 많은 구역은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해에 걸쳐 프랑스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만큼 페르 라셰즈 묘지에 매장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따른다. 가문이 묫자리를 소유하고 있거나, 프랑스 영토에서 사망하거나, 혹은 운명의 순간에 파리에 있었던 자들에게만 문이 열려있다. 그마저도 오랜 대기 시간을 거쳐야 한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여겨진다.

프랑스 샹송을 대표하는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묘지.
프랑스 샹송을 대표하는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묘지.

이름을 남긴 자들에게는 외로울 틈이 없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이 공간에는 관광객과 추모객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위인들의 명성에 걸맞게 연간 350만 명이나 되는 관광객이 페르 라셰즈를 찾는다. 최초의 정원식 묘지라는 점도 관광객들의 발길을 끈다. 묘지마다 놓인 꽃다발과 화려한 장식이 흡사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공동묘지라는 스산한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이 푸르른 초목 아래 차분함과 고요함만이 감돈다. 유명인들의 묘지를 찾아 이리저리 배회하는 사람, 한 묘지 앞에서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키는 사람,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 등 선선한 바람과 함께 지나간 자들의 빈자리가 살아있는 자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진다.

독특한 비석이 눈길을 끄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묘지.
독특한 비석이 눈길을 끄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묘지.

묘지를 되돌아 나오는 길목에 쓰인 한 라틴어 문구가 여운을 남긴다. "그들의 희망은 불멸로 가득 차 있다(Spes illorum immortalitate plena est)." 떠난 이들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이곳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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