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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량'과 진린
영화 '노량'과 진린
  • 경남매일
  • 승인 2024.01.31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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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김제홍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지난달 20일에 개봉한 영화 '노량'은 지난 2014년 '명량', 2022년 '한산'에 이은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영화에서 임진왜란이 발발되고 6년이 지난 1598년 12월, 이순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왜군들이 조선에서 황급히 퇴각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와 함께 조ㆍ명연합함대를 꾸려 왜군의 퇴각로를 막고 적들을 섬멸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왜군의 뇌물 공세에 넘어간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은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주려고 한다. 영화에서 진린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면이 그려지는가 하면 진심으로 이순신을 존중하고 용기 있게 전투에 임한다.

명나라 장수 진린에 대해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뇌물을 받고서 남원에서 기생질이나 하고 남원에 관우 묘나 만들면서 전쟁을 회피한 명나라 장수는 놀랍게도 수군을 담당한 진린이 아니라 육군을 담당한 유정(劉綎)이었다.

춘원 이광수는 지난 1931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이순신'에서 진린이 1만 명에 가까운 명나라 수군을 데리고 내려와 이순신의 행동을 방해해 적을 놓아 보내 마침내는 순신을 죽게 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고 했고,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와 김탁환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은 진린이 이순신의 공을 가로채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회유에 왜적의 퇴로를 열어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진린을 '성격이 포악하고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모두 그를 꺼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노량해전 열흘 전, 진린 도독이 적극적으로 왜적을 공격하자고 제안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진린이 출병하기 전 요동에 주둔하고 있을 때 선조가 보낸 선물을 보고 '아직 전공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런 선물을 받겠느냐'며 돌려보낸 적도 있고, 한양을 떠난 지 한 달 후 선조가 선물을 보냈는데, 돗자리와 종이만 받고 많은 선물을 돌려보냈다는 기록도 있으니 뇌물로 얼룩진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영화에서 진린은 자기보다 어린 이순신 장군에게 '노야(老爺)'라는 호칭을 쓴다. '야'(爺)는 윗사람에게만 쓰는 극존칭이다. 진린은 이순신과 조선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좋아한 것이 분명하다.

진린은 이순신의 전사소식에 크게 슬퍼했다.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는, '진린이 이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준 것을 사례하다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연려실기술'은 "이순신의 죽음을 듣자 진린은 배에서 엎어지고 넘어지기를 세 번이나 하면서, '함께 일할 이가 없구나'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의 야사로 유명한 '제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따르면 진린이 한양으로 향하던 중 이순신 장군의 고향에 들러 곡하고 그 아내와 아들을 조문했다는 기록도 있다.

진린은 명나라로 돌아가서도 많은 공을 세운다. 그의 아들 진구경(陳九經)은 청나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리고 진구경의 아들 진영소(陳泳素)는 명나라가 과거 1644년에 멸망하고 얼마 뒤에 할아버지 진린의 유언에 따라 가족들을 데리고 조선에 귀화했다. 진영소의 후손들은 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에 광동을 본관으로 하고, 진린을 시조로 모시는 광동진씨(廣東陳氏) 집성촌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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