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9:17 (토)
혀꽃의 사랑이 있어 열매 맺는 것이죠
혀꽃의 사랑이 있어 열매 맺는 것이죠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1.31 22: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를 통해 삶을 묻다 5
정일근의 시 '혀꽃의 사랑법'
혀꽃은 수분매개자를 유인
단단한 바라밀로 가는 가교
혀꽃 있어야 통꽃 결실 보여

'나는 유혹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유혹하고 유혹 당하면서 살아간다. 거울 앞에서 한껏 멋을 부리는 것도 유혹하기 위해서다. 유혹을 안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지 말고 긍정적 방향으로 생각해보자. 외적인 멋을 부리는 것도, 내적인 멋을 부리는 것도 유혹의 기술이다. 요즘 유행하는 뇌섹남, 뇌섹녀가 있지 않은가. 뇌섹남이란 '뇌가 섹시한 남자'를 줄여 이르는 말이다. 즉 주관이 뚜렷하고 언변이 뛰어나며 유머러스하고 지적인 매력이 있는 남자를 가리킨다. 뇌섹녀 역시 마찬가지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멋이 있어야 유혹을 할 수 있다. 유혹당한 자가 곁에 다가와야 사건이 일어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관계가 일어나야 나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다. 본질만이 중요하고 외적인 것은 하나도 안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외적인 유혹이 일어나야 본질을 보여줄 기회가 생긴다. 뇌가 섹시해서 유혹을 하든, 화려한 옷을 입고 아름다운 몸매로 유혹 하든, 언변으로 상대를 사로잡든지, 상대를 사로잡아야 깊숙하게 숨겨진 본질을 보여줄 기회가 생긴다. 유혹에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유혹하기 위한 나의 은유는 무엇인가? 은유로서 유혹에 성공했는가? 유혹까지 성공했지만 성과는 있었는가? 이런 복잡한 마음이 들 때 정일근의 시 '혀꽃의 사랑법'을 여러 번 깊이 읽어보길 권한다.

이 시가 주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기초적인 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혀꽃은 길게 혀 모양으로 이뤄져 있다고 해서 설상화라고도 한다. 구절초, 개망초 등의 두상꽃차례는 꽃이삭을 중심으로 해 여러 꽃이 모여서 그 모양이 머리 모양을 이뤄 한 송이처럼 보이는 것을 말한다. 부연하자면 안쪽에 통 모양의 작은 꽃이 돌려 달린다. 통 모양의 각각의 꽃은 씨방을 갖고 있어 수분이 이뤄지면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가장자리의 혀꽃은 크고 화려한 색깔로 수분매개자를 유인한다. 구절초는 통꽃과 혀꽃으로 구성된 두상꽃차례로 핀다. 두상꽃차례란 여러 개의 작은 꽃이 꽃대 끝에 촘촘히 달려 마치 한 송이 꽃처럼 보이는 꽃차례를 말한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혀꽃이 수분매개자의 역할만 하고 '헛꽃'으로 열매 맺지 못하지만, 슬픈 사랑은 아니고 혀꽃이 끝나는 곳에 '바라밀'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바라밀은 불교에서 태어나고 죽는 현실의 괴로움에서 번뇌와 고통이 없는 경지인 피안으로 건넌다는 뜻으로,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을 이르는 말이다. 혀꽃의 유혹도 그것은 사랑이었음을 언제쯤이면 알게 될까? 열매는 수많은 혀꽃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일례로 내가 가진 스펙으로 수많은 유혹의 '혀꽃'을 피워서 입사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 시작해서 얼마든지 더 다양하게 의미 부여를 해볼 수도 있다. 그곳에서 견디지 못하고 혀꽃처럼 떨어져 나오기도 하고 통꽃처럼 그곳에 남아 열매를 맺는 사람도 있다. 비록 그곳에서 혀꽃이었다 해도 '바라밀'에 닿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정신승리로만 귀결되는 것일까? 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혀꽃의 사랑법

  꽃은 언제나 비밀이 있어야 하지. 은밀히 그 비밀에 닿기 위해 나 역시 혀부터 쑥 내밀어보는 거야. 그런 혀를 꽃인 듯 내미는 두상꽃차례가 있어. 가령 당신이 사랑하는 만추의 하얀 구절초가 그래. 그 많은 순백의 긴 혀를 가진 혀꽃들이 꽃인 듯 내밀고 사랑을 유혹하지. 그 혀 깊은 곳에서 꽃은 노란 은유로 숨어 때를 기다리지. 혀와 혀의 뜨거운 시간이 지나면 은유는 저절로 열리는 꽃문이지. 꽃이라 믿었던 꽃은 혀꽃일 뿐, 내가 감춘 주제를 읽기 위해 비유부터 더듬어 오는 당신처럼 사랑이든 벌나비든 혀꽃을 향해 날아드는 거지. 그것이 열매 맺지 못하는 헛꽃이지만 슬픈 사랑은 아냐. 혀가 끝나는 곳에 내가 가진 가장 뜨겁고 단단한 바라밀波羅密이 숨어 당신 기다리고 있지. 수백의 혀를 둥글게 펼치며 지금 나는 고백 중이야. 사랑해. 사랑한다니까. 순간의 계절이 지나면 나는 사라질 것이니. 결국 당신 또한 사라질 것이지만.

-정일근의 '혀꽃의 사랑법' 시집에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