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02:19 (일)
"이병철 형님 덕에 부총리 장기영과 불편한 관계 풀었습니다"
"이병철 형님 덕에 부총리 장기영과 불편한 관계 풀었습니다"
  • 박광수 논설위원
  • 승인 2024.01.30 2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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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편- 청암과 이병철의 일화

제철소 건립 과정 대통령 지시 불응
내각과 불편관계 결국 부총리 사임
이병철 양자 골프 제안, 극적 화해
박태준(오른쪽)회장과 이병철 회장.
박태준(오른쪽)회장과 이병철 회장.

현재 세계적인 기업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의 고향은 경남 의령이고, 청암 박태준 회장의 고향은 경남 동래군(현 부산 기장군)이다. 두 명은 일본 와세다 대학교 동문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같은 경남권 출신, 동문이라는 이유로 이병철 회장은 청암을 각별히 아꼈다. 오늘은 두 사람 사이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청암이 포항에 제철소 건립 준비로 한창 바쁠 시기인 지난 1967년 7월 22일 박정희 정부는 제철소 입지 선정 축하 행진행사를 거창하게 시행했고, 기공일자를 개천절로 정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장기영 부총리를 통해 건설추진위원장인 청암에게 행사 참석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기본계약서 검토도 마치지 못한 청암은 대통령의 지시에 불복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장기영 부총리를 통해 올렸다.

"현재 포항종합제철의 업무를 총괄하는 저는 아직 검토를 상세히 못 마친 상황입니다. 계약서 검토를 끝마치고 확신이 서면 행사에 참석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계약서 사본을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보유한 김흥안에게 보여주며 면밀히 검토한다. 청암의 우려대로 계약서는 문제가 많았다. 합의각서에 독소조항이 있었는데, 5개국 8개사 제철소 자금조달 책임에 대한 명시가 누락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차관 도입에 대해 한국정부가 공동책임을 진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청암은 즉시 장기영 부총리 집무실을 방문해 계약서 내용의 부당함을 알리려고 했으나, 부총리의 비서들은 사전예약 없이 방문한 그를 막았다.

그러자 호쾌한 군인정신을 보유한 청암은 현장에서 고함을 질렀다.

"포항제철소는 국가적인 중대사요. 허나 건립에 진전은 없고 계약서 내용도 수준 이하요. 그래서 부총리에게 질의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외다."라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서들은 그를 막아섰다. 청암은 격노했고, 더욱 큰 고성으로 그들을 꾸짖었다. 당시 부총리실 옆방에 있던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 회장이 고성을 듣고 방을 나와 청암을 말리기 시작했다. 급할 것은 없으니 일단 진정하고 일을 차분히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암은 김 회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부총리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야 인마 손님이 어딨어? 너희 같은 비서들을 그냥 놔두면 나는 역적과 다름없는 놈이다."

후일담에 따르면 장기영 부총리는 청암의 소동 보고를 듣고서도 그에게 기공식에 참석하라고 지시했으나, 청암은 끝내 불참을 선언했다. 청암의 불참 선언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로 불러 자초지종을 묻는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 왜 내 말을 듣지 않는가? 까다롭게 굴 필요 없네. 적을 만들면 업무를 제대로 추진 할 수 없지 않은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일단 포항으로 내려가 기공식부터 마치게."

박 대통령의 의외의 저자세 설득에 청암은 대통령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각하, 저는 남을 헐뜯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흠집을 잡을 생각도 없습니다. 허나 합의각서에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첫발'부터 허술하면 국가대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박 대통령은 이 직언을 듣고 "자네 소신껏 하게"라고 말한다.

지난 1967년 10월 3일 개천절 오후 2시에 포항종합제철소 기공식은 포항시 공설운동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현장에는 수천 명의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총리, 건설부 장관, 상공부 장관, 재무부 장관 등 정부의 핵심 각료들이 참석했고, 샌드빅 코퍼스 부사장을 비롯한 KSA대표단, 전력회사, 건설회사, 무역회사의 주요 관계자들 등도 참석했다. 기공식에 참석한 장기영 부총리는

"하늘과 땅이 열린 지 4300년 만에 우리는 마침내 선진국들의 협조로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게 됐습니다"라며 "제2차 경제개발의 성패가 이 포항제철소 건설에 달려 있는 만큼 강철같은 일치단결로 우리의 과업을 성취해 나갑시다"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말을 마친 장기영 부총리는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당일 박 대통령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는다.

이날 서울 대한중석 사무실에 있던 청암은 이 소식을 듣자 부총리에게 인간적인 미안함을 느꼈다. 본인 때문에 부총리가 해임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청암이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을 당시 삼성 이병철 회장은 이 소식을 듣고 장기영 전 부총리와 청암의 불편한 인간관계를 풀고자 두 사람의 골프장에서의 라운딩을 제안했다. 이병철 회장의 주재로 골프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불편한 관계를 풀었다고 한다. 나중에 청암은 이병철 회장에게 '귀한 선물'을 받았다고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며칠 후 호주 출장길에 있던 청암은 장기영 전 부총리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청암은 눈물을 흘리며

"생전 불편한 관계를 풀고 별세하셨으니 내 마음의 무거운 짐은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지금 현세에는 없는 세 분은 하늘에서도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필자는 가끔 생각한다.

박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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