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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⑧
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⑧
  • 경남매일
  • 승인 2024.01.24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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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김제홍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자부랑개에서 골개(동항리)로 이어지는 길은 동뫼 너머로 이어지는 언덕길이 유일했고 지금 있는 해안도로는 일제 말기에 건설된 것이다. 자부포와는 달리 골개에는 주로 조선인들이 거주했다. 골개에서 언덕을 넘어 자부포로 들어오는 마을 입구에 순사주재소가 있어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을 감시할 수 있었다. 주재소 바로 옆에 일본인 학생들을 위한 심상소학교가 있었고 그 건물은 광복 이후에도 학교로 사용되었다.

심상소학교 옆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소학교의 사택이 있었고 사택 건너편 언덕에 우체국이 있었다. 우체국 뒷길로 올라가면 산등성이에 평지가 있었고 그 곳은 곤피라신사(金比羅神社)가 있던 곳이다. 일본인들이 물러간 후 신사가 있던 자리에 사찰이 들어섰다는데 지금은 그마저 사라지고 없다.

곤피라신사 뒤쪽 골짜기에는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현재는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비석 한 기만 남아있다. 신사와 공동묘지가 있었던 장소의 일부는 밭으로 개간되고 일부는 방치되면서 황무지가 되어 흔적조차 없으니 이제는 기억 너머 역사 속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자부포의 거주지 안쪽은 유흥가였다. 아베 당구장 건물, 목욕탕과 식당 명월관 터도 남아있는데,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술집이나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앞쪽 해안가에는 요시호다 목욕탕, 하시모토 잡화점이 있었다. 마을의 동쪽 외곽 바닷가 구석에는 일본인들의 화장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매립되어 흔적조차 없다.

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용수의 확보인데, 일본인들 이주 전에는 마을 위쪽 주재소 바로 아래에만 우물이 있었다. 이주민이 늘어나자 일본인들이 마을 곳곳에 우물을 팠지만 해안 가까이 팠던 우물에는 염분이 많았다. 그래서 자부랑개의 서편 골개에 저수지를 축조해 이곳의 물을 자부포로 끌어와서 마을 입구 등성이에 설치된 물탱크에 저장했는데, 이것이 욕지도의 첫 상수도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들이 주로 살던 골개에는 면사무소가 있었고 정기시장(4일, 9일 열리는 5일장)이 열렸다. 198평의 욕지 장터는 1927년 당시 서태민 욕지면장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자부랑개 건너 관청리와 입석리에는 일본인 가옥 3채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의사였고 두 사람은 잠수기 어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잠수기 어선 5척을 운영했는데 현지인의 구술에 따르면 회사명이 '마루세'였다고 한다. 잠수기 어업자들은 채취한 전복을 삶아 건조시켜 일본으로 운반했다. 관청리 등성이 아래는 일본인들의 묘지가 있었는데, 일본이 패망하자 유골함을 파가지고 돌아갔다고 한다.

입석리와 관청리 앞에는 옥섬이라는 봉우리가 2개인 작은 섬이 있다. 북쪽 큰 봉우리에는 일본인의 묘지가 있었고, 남쪽의 작은 봉우리에 '카미사마(神樣)'를 모시던 사당(祠堂)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사당에서 수시로 풍어제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비석이 있던 기단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입석마을의 끝에는 '구바키'라는 일본인 목수가 운영하던 조선소가 있고 지금도 수리조선을 하고 있으니 일본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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