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9:14 (토)
[한지현의 '안녕, 프랑스'] 이우환의 공간 가로지르는 '物(모노)' 대가 창작정신 품고 고뇌·흔적 투영
[한지현의 '안녕, 프랑스'] 이우환의 공간 가로지르는 '物(모노)' 대가 창작정신 품고 고뇌·흔적 투영
  • 한지현
  • 승인 2024.01.24 2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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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현의 '안녕 프랑스'
'아를'서 만난 한국작가
과거~현재 역사 깃든 공간 속 작품 전시
사물과 공간이 만나는 '조화·관계' 주목
50년 프랑스 인연 전시관으로 결실 맺어
이우환 작가
이우환 작가

예술의 도시 프랑스 아를의 골목길 한 구석,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 새겨진 현판이 눈을 사로잡는다. 18세기의 역사를 지닌 베르농 저택(Hotel Vernon)에 터를 마련한 주인공, 바로 한국의 대표 작가 이우환이다. 아를의 원형 경기장과 도시의 중심 광장 사이에 자리한 '이우환 아를 (Lee Ufan Arles)'은 지난 2010년 일본 나오시마섬에 건축된 '이우환 미술관'과 2015년 한국 부산 시립미술관에 마련된 '이우환 공간'에 이어, 이우환 작가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세 번째 상설 전시관이다. 나오시마 미술관 건축을 담당했던 작가의 절친한 친구이자 현대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이번 미술관 공간 보수에 참여하기도 했다.

돌과 돌 사이의 재배치를 통해 사물의 관계를 강조하는 연작 '관계항'.
돌과 돌 사이의 재배치를 통해 사물의 관계를 강조하는 연작 '관계항'.

이우환은 지난 1936년 한국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교를 중퇴한 후, 일본으로 넘어가 1961년 니혼대학교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60년대 도쿄 화랑에서의 개인전을 계기로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하면서, 당시 일본의 미술 운동 중 하나였던 '모노파'를 주도하기도 했다. '모노(物)'는 일본어로 '물체' 또는 '물건'을 뜻하는 단어로, '모노파'는 물체 그 자체의 존재를 탐구하는 미술 운동을 일컫는다. 최소한의 장치들을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대상과 공간이 갖는 조화와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특징이다.

미술관 입구에서 관객들을 맞이하는 안도 다다오의 작품.
미술관 입구에서 관객들을 맞이하는 안도 다다오의 작품.

이우환과 프랑스의 인연은 지난 1970년대에 시작됐다. 작가가 일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1971년 파리 비엔날레를 계기로 이우환의 작품들이 처음 프랑스에 소개됐다. 프랑스의 자유로운 예술 창작 환경에 매료된 그는 이후 파리에 작업실을 둔 채 독일, 덴마크,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의 활동을 이어 나가며 동양 미술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그 공로로 지난 2007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2015년 베르사유 궁전의 '올해의 전시 작가'로 선정돼 특별 초대전을 선보였을 만큼, 오늘날 세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작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작가의 세 번째 상설 전시관이 프랑스에 자리한다는 점은 작품 활동의 주 무대 중 하나였던 프랑스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을 보여준다. 삶의 터전이었던 한국을 떠나, 작품 활동에 불을 밝힌 일본을 거쳐, 예술 세계의 꽃을 피운 프랑스에 도착하기까지의 긴 여정, 그 긴 시간 고뇌의 흔적들이 이곳 아를 미술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더욱이 파리가 아닌 아를에 미술관을 지었다는 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폴 세잔 등을 비롯한 세계적인 작가들의 창작 정신을 이어 나가겠다는 작가의 야심 찬 포부가 드러나기도 한다.

기다란 철판과 바위 둘의 단순한 대상들로 구성된 연작 '관계항'.
기다란 철판과 바위 둘의 단순한 대상들로 구성된 연작 '관계항'.

아를은 프랑스 유일의 국립 사진 학교, 세계적인 사진 축제 '아를 국제 사진전(Les Rencontres d'Arles)', 스위스 루마 재단의 예술센터 '루마 아를(Luma Arles)'이 자리한 도시로서 예술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고 있는 곳이다. 로마 시대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도시에 새로운 예술의 바람이 부는 점은,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교차하는 공간의 시간성과 관계성에 주목하는 이우환의 작품 세계와도 맞닿아있다.

미술관에서는 연작 '관계항(Relatum)'을 비롯한 작가의 대표적인 설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나무, 돌, 철판 등 손을 거치지 않은 날 것의 소재들을 그대로 활용한 작품들이 저택 곳곳 스며들어 있다. 같은 사물들이 각기 다른 공간, 서로 다른 형태로 만나며, 매 순간 새로운 작품이 태어난다. 공간의 배치로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작품들 뒤로 '사물'과 '관계'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 여실히 드러난다. 작품 주변에는 침묵 속에 오랜 시간 작품을 관조하는 관객들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작품과 함께 사색과 명상에 빠져드는 시간은 철학적인 이우환만의 작품 세계가 갖는 매력이다.

줄지어진 붓 자국이 인상적인 연작 '점으로부터'.
줄지어진 붓 자국이 인상적인 연작 '점으로부터'.

계단을 타고 한 층 올라서자 단조로운 구성과 단색으로 가득한 회화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2층에서는 1973년부터 시작한 연작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등 작가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 3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설치 작품들이 사물과 공간 사이의 관계에 주목했다면, 회화 작품들은 점과 선, 면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다. 여백으로 가득한 캔버스는 화려한 장식과 묘사가 가득한 작품과는 또 다른 깊은 감동을 끌어낸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붓 자국 사이로 무한히 중첩되는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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