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11:51 (일)
부강한 나라 가락국
부강한 나라 가락국
  • 경남매일
  • 승인 2024.01.22 2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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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서기 42년 김수로왕은 한반도 남부의 현재 김해를 도읍지로 해 가야(가락국)를 건국했다. 가락국은 서기 전에 세워진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늦게 건국됐고 삼국보다 이른 서기 532년에 멸망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모든 영광은 승자가 독식하고 패자는 말없이 사라져 간다. 가락국 역시 나라를 잃은 후 거의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 『가락국기』 서두에 일연스님은 "문종조 대강년간에 금관지주사 문인이 지은 것을 여기에 간략하게 줄여 싣는다"라고 썼다. 이것으로 보아 일연스님 생존 당시만 해도 『가락국기』 완본(完本)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하지 않아 가야의 온전한 모습을 알기 어렵다. 하지만 요약해 전해오는 가락국기도 찬찬히 살펴보면 숨겨진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현대인들이 가진 잘못된 관념 중 하나는 가야인 같은 고대인들이 현대인보다 아둔하고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렇지만 않았다는 게 『가락국기』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 등의 옛 문헌을 보면 가야인들의 삶이 풍요로웠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락국기』의 시작 부분을 보면 가야 건국 이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이 땅에는 나라 이름도 없었다.. 구간이 백성을 통솔했다.. 대부분 사람은 산야에 모여 살면서 농사짓고 살았다..' 등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젊은 군주 수로왕이 가야를 세우고 난 이후부터 이곳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는 신답평에 새 궁전과 관청을 지었고 천 오백 보 길이의 외성을 쌓아 방위를 튼튼히 했다. 또 나라를 세운 지 6년 후인 서기 48년에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아내로 맞았고 신문물을 도입했다.

가야가 부유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이 『가락국기』에 나온다. 공주를 모시고 온 뱃사공들에게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잠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 그리고 보화도 주었다'고 한다. 또 뱃사공을 돌려보낼 때 각 개인에게 '멥쌀 10섬씩과 베 30필씩을 주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가야의 경제적 수준을 알 수 있다. 가난하다면 이 정도의 품삯은 줄 수가 없을 것이다. 허왕후가 왔을 때는 음력 7월 말이었으니 아직 추수하기 전이다. 추수 전에 뱃사공에게 이렇게 많은 쌀을 주었다는 것은 대량의 쌀을 미리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김해와 인접한 밀양에 남아있는 삼한 시대의 인공저수지 수산제(守山堤)다. 고대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밀양은 농업이 발달한 곳이었고 낙동강을 통한 무역으로 각종의 다양한 물산들을 교류했다. 육로보다 더 많은 물산을 이동할 수 있었던 낙동강은 요즘의 고속도로와 같았다. 이처럼 가야는 바다와 함께 강을 이용한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로왕은 당대 최고의 부가가치를 가졌던 철을 생산뿐 아니라 유통 판매까지 했다. 3세기 말 강수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에 가야에 대한 묘사가 있다. '토지는 비옥해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며 누에치기와 뽕나무를 가꿀 줄 알아서 합사비단을 짤 줄 안다.' 또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 예(濊) 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도 공급한다'라는 내용이다. 위의 기록에 보이는 합사비단은 겸포( 布)인데 삼베와 비단을 섞어 짠 것으로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훌륭한 방한(防寒) 소재였다. 고대인들도 무명옷으로만 추운 겨울을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또 『가락국기』에는 '길가는 자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 밭 가는 걸 양보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가야인의 어진 심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글이지만 한편으로 보면 '가야가 부유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흔히 '衣食足而知禮節'이란 말처럼 소위 먹고살 만해야 양보의 미덕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가야의 쇠약에 대해선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 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이유가 '군사력이 약해서'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군사력이 약해진 원인은 뭘까? 추정컨대 가야는 건국 이후부터 평화를 숭상한 수준 높은 문화국가였다. 그 때문에 문화와 예술 그리고 높은 철학적 가치를 추구했기에 상대적으로 국방력은 점점 약해졌을 것이다. 조선이 문치를 주장하다가 결국 임진왜란을 맞아 큰 위기를 맞았던 것처럼 가야 또한 그러한 이유로 약해졌고 결국 신라에 복속되지 않았나 싶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중생 세계에서는 높은 이상조차 힘을 갖추지 않고는 지키기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수로왕 당대와 가야 초ㆍ중기 해상왕국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었을 때의 가야는 부강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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