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5:48 (토)
"시조는 함묵의 겨울산처럼 카타르시스 주죠"
"시조는 함묵의 겨울산처럼 카타르시스 주죠"
  • 하영란 기자
  • 승인 2024.01.22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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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는 자유시와는 달라
시대 문제점을 직시해야
시는 잎과 뿌리가 있어야
남승열 시조시인
남승열 시조시인

남승열 시조시인

한때 고시 낭인이 돼 청춘을 탕진하고 처가에 내려와 김해 동상시장에서 26년째 채소장사하고 시조를 쓰고 있다. 지난 가을 이호우·이영도 문학상이라는 큰상을 받고 흥보네 박처럼 썰어보니 역시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노자 선생님을 더욱 흠모하기로 했다. '어깨를 기대는 저녁', '즐거운 감옥' 시조집이 있다.

 

모과등

 

울퉁하고 불퉁하던 지난 세월 얘기하며

어색한 햇살 웃음 한참을 마주 본다

저만치 앞서 걷다가 손목 슬쩍 당긴다

걸음이 느린 아내 가을산을 가리키며

조금씩 모자라도 저리 곱게 물든다고

어깨를 기대는 저녁, 모과등이 켜진다

   -가장 아끼는 시조(남승열시인 자신의 작품 중)

 

흐르는 강물을 보며

 

별들의 기도서를 손 모아 읽는 저녁

세모의 창밖은 경전처럼 굳어 있다

잊고자 애쓰던 기억 싸락눈을 뿌린다

 

꽃다발처럼 안기던 아이들 웃음소리

따끈한 찌개만 있어도 행복했던 식탁

비번을 바꾸지 못하는 가장의 닳은 지문

 

빛살이 부러진 어둠을 껴입고서

내딛는 걸음마다 허공을 두드린다

건조대 작업화 한 켤레 환히 웃고 있는데

 

생각을 가로질러 몸이 이끈 강둑에서

순간의 높낮음도 수평으로 반짝이는

흐르는 강물을 보며 햇살 속을 걷는다

- 2023년 이호우·이영도 시조대상 수상 작품(남승열시인 수상작품)

 

절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다. 수많은 광고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보여지는 것이 거의 전부인 시대를 살고있는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호흡의 음보를 가진 시조를 읽다 보면 욕망을 쫓아가고 있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된다.

시조를 쓰려면 적실한 언어를 고민해야 한다. 원시어를 즉 본질적인 언어를 찾아가야 한다. 고민없이 쓰다 보면 울림이 없다. 몇 십년을 써도 그대로일 수 있다. 그래서 글을 쓸수록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시조를 배울 때 제대로 배워야 하고 사유가 없으면 뿌리는 없고 잎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이 안 쓰는 시어를 찾아내서 시를 써야 한다. 요즘 시를 읽다 보면 뿌리가 없고 이파리만 있는 시가 많다. 읽고 나면 여운이 없는 시가 많다.'고 고민하는 남승열 시조시인을 만났다. 그는 수많은 시인 중에 특히 시조시인 중에 튼실한 뿌리를 내린 시조를 쓰고 있다. 인문학 공부에도 한순간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남승열 시인을 만나서 시조의 시대정신과 여러 고민들을 들어보았다.

남 시인은 1990년 겨울부터 시조를 꾸준히 써왔다. 원래는 시를 썼다. "시조를 샘터를 통해 접하게 됐다. 기고란에 보낸 시조가 '선'으로 당선됐다. 쓰다보니 시조의 보법이 나한테 맞아서 시조를 꾸준히 지금까지 쓰게 됐다"고 했다.

시인은 어떤 정신을 가지고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먼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직시하고, 상응한 시대정신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요즈음 같으면 성소수자의 인권문제, 부당한 해고로 인한 노동자의 삶과 파탄 그리고 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인권유린 등을 공감하고 고민한다. 특히 정형시인 시조의 時는 자유시의 詩와 다르다. 그 시대를 노래하는 것이 시조다. 따라서 시대정신을 고민하지 않고 학습된 대로 쓴다는 것은 문제가 있죠.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말처럼 아류에 빠지지 말고 시의 길을 헤매는 게 충분히 좋다고 본다."

선생님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지

"먼저 논어에서 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慾 勿施於人,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과 도덕경의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시계추가 제자리로 돌아오듯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논리- 철학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을 때는 침묵하라'(원래의 뜻과는 다르지만 어떤 관계에서 궁색한 변명이나 해명보다는 침묵하는 게 낫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구체적 개별적 사안에서는 거기에 맞게 진심을 다해야겠죠."

정도를 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어디에 기웃대지 않고 소신 있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전제로 자아비판과 성찰이 따라야겠지요. 그리고 어떤 직분이 주어진다고 덥석 받기보다는 그것이 부정의한지, 다수를 위한 것인지 또 중도포기하지 않고 책임있게 마무리할 수 있는지 등을 숙고해야 한다."

남 시인은 민감한 길에 선 바른 걸음 그리고 낮은 목소리의 저항 시인인 라이너 쿤체(독일작가. 1933~ )의 짧은 시를 소개하며 추앙하는 작가라고 한다.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쿤체의 '뒤처진 새' 전문

시조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면

"사실 등단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시조를 써왔는데 1997년 가을 한밭 시조백일장의 공고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장원 상금이 500만 원으로 되어 있어서 순간 마음이 변했다. 그때 유학 갔던 동생이 느닷없이 결혼을 하겠다고 해서 형 체면도 있고 해서 참여하게 되었다. 시제가 '국토'여서 무난하게 마치고 점심을 먹는 중에 장원이 22번이라고 해서 괜히 왔구나 싶었다. 차상까지 부르는데 제 이름이 호명되지 않아 급실망하여 돌아서 가는데 '경남 김해~'라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남승열, 남·승·열 하고 연호를 했다. 그야말로 극적으로, 현기증이 핑 돌았다."

이호우·이영도 시조 대상을 수상하셨다. 소감은 어떠신지?

"시조단의 권위 있는 상을 받아서 기쁘다. 앞으로 그에 걸맞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지 염려된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시조를 대하는 자세라고 본다. 노벨상 수상자인 '옥타비오 빠스' 말처럼 기존의 언어를 적출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시어를 심어야 하고, 쉽진 않겠지만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시조의 매력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시조의 매력은 언어의 절제에 있다고 본다. 할 말 다 하지 않고도 하늘과 땅과 사람을 울릴 수 있는 형식 안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즉 3장 6구 12음보라는 45자 내외의 민족시다. 쓰면 쓸수록 함묵의 겨울 산처럼 말 없는 말로 카타르시스를 주는 문학양식이다."

사회나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즘은 누구나 전문가인 유사 전문가 시대다. 뿌리는 없고 잎만 찰랑대는 현란한 수사의 시대다. How가 너무 넘쳐서 What은 간 곳 없다. 어느 정도 대화와 타협의 차선이 선택되면 구체적 실천으로 나가야 할 텐데 진영논리에 갇혀 강성만이 살아남는다. 함께 비를 맞는 세상을 얘기하시던 쇠귀 신영복 선생님이 그립다. 사람마다 자기 시절이 있다. 매화가 피는 시절이 있고 국화가 피는 시절이 있듯이 말이다. 경험상으로 억지로 되는 법은 없다. 어느 길을 정했으면 묵묵히 걸어가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 길은 걸어가야 길이 된다는 것이 지극히 평범한 진리다. 왜 어려움이 없겠는가?"

책을 안 읽는 시민에게 한 말씀

"하루에 최소한 1시간은 책을 읽으려고 한다. 그러한 생활을 지속하다 보니 속이 든든하다. 가끔 자존감이 떨어질 때가 있는데 그땐 틀림없이 독서를 며칠간 못했을 때다. 톨스토이에게 한 독자가 묻는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나요? '좋은 책을 만나든가, 좋은 사람을 만나든가'로 대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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