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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사효 이야기
이십사효 이야기
  • 경남매일
  • 승인 2024.01.2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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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이십사효(二十四孝)>는 동양효의 규범으로 삼았던 중국의 효자전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도 <이십사효>를 효행의 모범사례로 삼아 실천궁행했다. 누천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 뿌리내려온 동양사상의 핵심은 충과 효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인륜지도의 근본으로 삼았다. 비록 충효의 실천방법이 시대변천에 따라 많이 변질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

중국 <이십사효>는 시대 흐름에 한참 뒤진 효전(孝傳)이기는 하지만 온고지신으로 상고해 보면 본받아야 할 점들이 많다. <이십사효>는 순 임금의 효감동천(孝感動天)에서부터 육적의 회귤유친(懷橘遺親), 노래자의 희채오친(戱彩娛親) 등 24가지 효행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이십사효>에 나오는 효자 이야기는 시대에 뒤진 황당한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부모자식 간에 맺어진 혈연관계는 천륜(天倫)이기 때문에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의 탈을 쓰고 천륜을 저버린 패륜 행위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적 상황(배금주의)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돈은 인간다운 삶을 유지시켜 주는 필수재화지만, 동시에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화로도 작용한다. 예전엔 효도가 종속적 의무규범이었다면, 현대는 각자 독립된 인격체로서 상보적인 상하유친(上下有親)의 관계로 변화되었다.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24효의 대표적 사례인 '육적회귤'과 '노래자 희채오친'에 대해 얘기해 보자. '육적회귤(陸績懷橘 또는 懷橘遺親)'은 중국고대 정사(正史)삼국지에 나오는 육적(陸績)의 효도 이야기다. 육적은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으로 효심이 뛰어났으며 천문과 역산 등 다방면에 걸쳐 박학다식한 학자였다. 손권 휘하에서 직간을 논하는 주조언과 울림태수를 역임했으며 <혼천도>, <주역주>, <태현경주>를 저술했다.

그가 6살 때 그의 부친 육강을 따라 구강에 사는 원술을 뵈러 갔는데 그때 원술은 육씨 부자에게 귤을 대접했다. 당시 귤은 귀한 과일로 특별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이었다. 이때 육적은 귤을 좋아하는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귤 3개를 슬쩍 품 안에 숨겼다. 그러나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오다가 품 안에 감춘 귤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때 원술이 무안하지 않게 웃으며 말하기를 '육량은 내 집에 손님으로 와서 떠날 때 어찌하여 주인의 귤을 감춰 가느냐?'고 물었다. 이때 육적은 '저희 어머님이 귤을 무척 좋아하셔서 돌아가서 어머님께 맛보게 해 드리려고 그랬습니다'고 이실직고했다. 이때 주인 원술은 어린아이의 효심에 감복해 귤을 더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노래자의 '희채오친(戱彩娛親)'에 대한 효도전도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에 노래자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 제왕으로부터 수차례 출사를 권유받았으나 극구 사양했다. 혼란한 시기에 자나 깨나 자식 걱정하는 늙은 부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는 깊은 산골에 들어가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면서 농사를 짓고 은둔했다. 그 당시 노래자의 나이가 70이었다. 이미 본인도 늙어서 천명을 기다리는 나이인데 더 늙은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 그는 부모님이 나이를 잊고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흰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갖고 놀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행동했다. 부모님은 아들이 어린만큼 젊은 시절을 사는 것처럼 느끼셨는지 항상 건강한 기운이 넘쳤다. 아들이 넘어져 울고, 물을 뒤집어쓰고, 아기처럼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요즘처럼 살기 분방한 세상에 이런 식으로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맞벌이한다고 제 자식 돌보기도 버거운 세상이 되었다. 24효는 아득한 농경시대의 효도 이야기라 실제 이런 효행을 기대하는 부모는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마음만이라도 부모에 대한 보은지심으로 공경한다면 효자소리를 듣고도 남을 것이다. 결국 자신이 심은 효심의 뿌리는 세세연연 후대까지 이어져 부자유친(父子有親) 하는 화목한 가풍으로 남을 것이다.

'노래자 희채오친' 효도사례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전의이씨(全義李氏) 문중에 전해진 효행 이야기다. 세종 때 강원도관찰사(종2품)를 지낸 이정간은 나이 80에 100세 노모가 살아 계셔서 임금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직을 간청했다. 직을 물러난 후 노래자처럼 '희채오친'의 효를 다했다. 이에 세종 임금은 그의 효심을 치하하여 정2품 벼슬(판서)을 내리고,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이라는 친필휘호를 하사했는데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훈이 되었다고 한다.

부모자식 간에도 주고받는 게 있어야 어른 대접 받는 각박한 세상이 되었지만, 천륜지도(天倫之道)인 효도는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사람다움의 기본도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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