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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노백용(盧百容) ② 존경받는 삶
독립운동가 노백용(盧百容) ② 존경받는 삶
  • 경남매일
  • 승인 2024.01.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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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 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 교장

노백용은 1923년 처남인 안광천이 만든 사상 단체 `제4회`(第四會)에서 활동했다. 1927년에는 제3차 조선공산당 경상남북도 책임자로 활약한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약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 김해지국 기자로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28년 2월 부산에서 개최된 제4회 경남기자대회에서 대회 집행부 의장과 의안 작성 위원을 맡았다.

1930년 12월 김해지역 신간회 대표위원으로서 중앙검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통의부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자금을 모집하려고 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이 일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특파원 송기송이 독립자금을 얻기 위해 김해에 사는 허발(許 )에게 3000원을 받은 사건에서 비롯됐다. 노백용은 여기에 연루돼 재판에 회부됐고, 1931년 2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일보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고 부산에서 형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근근이 지내다 광복 후 자유의 몸이 됐다. 해방 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경남지부도 조직됐는데, 노백용이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대구 10.1 사건에 참여했다가 가족과 함께 투옥돼 몇 달간 취조를 받았다.

1946년 대구 10.1 사건시 선산지역의 책임자로 살해당한 박정희의 친형으로 김종필의 장인이었던 박상희는 노백용과 유사한 삶을 살았다. 박상희는 1927년 신간회에 참여해 활동했고 1935년에는 동아일보의 구미 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활동했으며, 일제강점기 말기에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건국동맹에 참가했 활동하다가 체포돼, 수감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선산 지부를 창설하고 건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1946년에는 조선공산당 선산군당 총책이 됐다. 두 분은 당시의 지역민들에게 모두 존경받는 사람들로도 유사했다. 박정희는 존경하는 형님이 살해당하자, 공산당에 가입하고 군부내 조직책이 된다.

노백용이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것은 김정한이 쓴 소설 <옥중회갑>과 <설날>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소설들을 김해 은석문화회관 `고석규비평문학관`을 통해 읽게 해주신 남송우 고신대 석좌교수와 이진서 관장께 감사를 전한다.

김정한은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사하촌>이 당선돼 문단에 나와 20세기 민족사의 질곡을 민중과 더불어 온몸으로 견뎌 내면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주변부 인간의 현실을 양심적인 시선으로 고발하는 50여 편의 소설을 쓴 부산대 교수를 역임한 국문학자다. 특히 분단극복이라는 민족의 숙원을 자신의 문학적 과제로 삼았던 실천적 문학인으로 노백용을 존경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옥중회갑(獄中回甲)>은 1946년 3월 [전선(前線)] <창간호>에 실린 단편소설이다. 노백용을 K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40여 년을 민족의 해방을 위했 온갖 고난을 겪어왔지만, 첫인상은 촌로같이 평범하고 인자한 노인같았다고 묘사한다. 갈수록 인자한 그 얼굴과 태도에 평범하지 않은 의지력과 꿋꿋한 지조에 절로 머리가 숙어졌다고 한다. 회갑날 폭력단에 의한 행패를 막아내다가 헌병대에게 잡혀가면서 "일본 놈 밑에 있을 때는 감옥에서 생일을 보냈는데, 해방 덕엔 회갑까지 거기서 지내겠네그려"하는 말을 남기면서 잡혀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소설은 마감이 된다.

<설날>은 지난 1947년 6월 [문학ㆍ비평] <제1호>에 실린 단편소설이다. 노백용의 장남 노재갑은 1933년 김해농민조합 독서회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 1938년 김해농민조합 재건 사건으로 징역 3년을 받아서 복역하고 해방 후 김해군 인민위원장을 지냈다. 차남인 노재을은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김해군 대의원, 딸 노남교는 부녀동맹 경남도지부 간부를 지냈다.

김정한의 <설날>은 노백용의 딸과 외손자가 감옥에 있는 노백용과 노재갑을 설날에 면회 가는 것을 묘사한 소설이다. 노백용의 사위는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후 1946년 10월 인민의 권리를 찾는 항쟁을 하다 반동의 총에 의해 억울하게 살해당한 사람으로, 노백용은 오로지 인민의 참된 벗으로서 <민전>의장의 자리를 지킨 연유로 감옥에 끌려간 것으로 나온다.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설날에 감옥에 있어야 하는 아픔을 그리고 있다.

1949년 11월 국민보도연맹 경남도연맹의 간사장을 맡았다. 6.25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8월 22일 방첩대에 체포돼 부산교도소로 끌려갔고, 보도연맹 학살사건이 벌어질 때 함께 처형될 뻔했지만, 김정한의 제자였던 방첩대 요원이 김정한과 함께 풀어준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자택에 은거했고 1961년 8월 1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노백용의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했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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