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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노백용(盧百容) ① 교육자의 삶
독립운동가 노백용(盧百容) ① 교육자의 삶
  • 경남매일
  • 승인 2024.01.11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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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김해인물연구회 회장께서 노백용(盧百容)에 관한 글을 부탁하였다. '해동이가 전하는 김해인물 이야기 3'에 실렸다. 노백용(盧百容)은 독립훈장 건국포장을 추서받은 항일 독립운동가로 일제 강점기 민족·교육·언론·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많고 그 진면목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어서 자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노백용은 1885년 10월 16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우부면 회현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회현동)에서 아버지 노상욱과 김해 허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노상욱은 김해 부사를 지낸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도였다. 백부 노상열도 허전의 문도로 탁지부 징세서장을 역임하고 대한자강회 김해지회원으로 사회 계몽운동을 하였다.

장인은 법관양성소와 외국어학교 교관을 거친 통정대부로 1907년 궁내부 수학원(修學院) 교관을 역임하였다. 교육진흥을 위해 설립된 교남학회의 교육부장 역할을 한 진영읍 의전리 광주 안씨 집안의 안택중(安宅重)이었다.

처남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자혜병원 의사로 근무하다가 1923년 1월 김해청년회를 조직하여 야학으로 교육활동을 하였던 안광천(안효구)이다. 안광천은 1923년 8월에는 북성회 순회강연을 계기로 사회주의 사상 연구를 위해 제4회(第四會)를 조직하였다. 제3차 조선공산당을 이끌었던 그는 1929년 북경에서 김원봉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을 한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두 학회가 모두 설립된 곳은 경남에서는 동래와 김해 두 곳이다. 성재 허전의 가르침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교남교육회 김해 지회는 광주 안씨 안택중과 안효원, 광주 노씨 노백용과 노인용, 김해 허씨 허증과 허민, 달성 배씨 배동석과 배동찬이 주도하여 설립하였다.

배동석은 세브란스 의전 학생으로 탑골공원 만세시위 때 학생대표로 참석하고 고향 김해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일제의 고문으로 젊은 나이로 죽게 되는데, 부친 배성두 장로는 1894년에 김해교회를 설립하였다. 평양 소래교회 다음으로 한국인이 세운 가장 오래된 교회다. 의사로 보장된 삶을 두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희생한 배열사가 꿈꾸었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

노백용은 김해지역의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양반 가문인 광주 노씨가 부계였고 김해 허씨가 모계였다. 또 처가 역시 당시 김해지역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인 광주 안씨였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한학과 학문에 접할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기숙사를 제공하였으며 졸업 후 취직이 보장되어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 밀양공립보통학교에 훈도로 발령받았다. 이 사실은 1908년 승정원 일기에 기록(승정원일기 3219책 (탈초본 141책) 순종 2년 3월 25일 경술 2/2 기사 1908년 光緖(淸/德宗) 34년盧百容任公立密陽普通學校本科訓導, 李欽穆任公立密陽普通學校本科副訓導)되어 있는데 같이 발령받은 사람은 부훈도였다. 이 사실은 노백용이 관립한성사범학교 정규 본과를 졸업하였음을 알게 한다.

1912년부터는 김해공립보통학교(김해동광초등학교 전신) 훈도로 근무하면서 1919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3·1 독립만세운동 사건으로 공립학교 근무가 어려워 김해사립합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1922년 1월 김해청년회 의사부장을 맡았고, 그해 4월 김해연합대강연회에 김해교육회 대표로 참석하여 '교육회와 김해 장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당시 청년단체들은 강습소나 야학을 운영하였는데 노백용은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쳤다('동아일보', 1921년 9월 19일. 강사는 모두 명예직으로 하였고 과목마다 강사를 두었다. 수신·역사·商事要項·경제대요는 崔瑗浩, 일어·산술은 일본인 井上嘉六, 조선어·한문은 盧百容과 林鍾翰, 理科는 安孝駒, 농업·習字·작문은 張洪律, 지리·창가는 尹炳仁, 부기·산술은 朴基洪 등이었다.)

천도교청년회 김해지부의 경우 야학에 필요한 재정 총 400원 가운데 200원은 학생(150명)의 월사금으로 충당하고 나머지 200원은 청년단체에서 부담했다. 천도교청년회 김해지부에서는 방정환과 색동회가 주관한 1923년 5월 1일 제1회 어린이날 행사를 김해에서도 시행하였다.

방정환은 천도교 교주로 3·1 독립운동 33인의 대표였던 의암 손병희의 사위다. '늙은이'와 '젊은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어린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지어서 사용하였다.

제1회 어린이날 행사에서 방정환은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에서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라고 어린이들을 인격체로 존중해 주길 당부했다. 제1회 어린이날 행사의 구호는 "씩씩하고 참된 어린이가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며 도와갑시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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