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마시는 여유 동안 성별에 관계없이 너는 "왜 사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불만스러움을 토하기 위해 사느냐. 재물, 권력이 그리워 사느냐" 물어보세요. 그 답은 다양할 것이다. 필자가 어느 교도소 교육위원으로 있을 때 교육생 100여 명을 대상으로 강의 도중에 터무니 없이 교육생에게 "너는 왜 사느냐"라고 질문을 했다. 마음에 있는 생각대로 솔직하게 답을 해달라 했다. 이 질문을 받은 교육생은 하나같이 쾌한 대답없이 "하하" 소리내어 웃는다. 교육 도중에 질문 자체도 문제이지만 인생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할수록 자신에 대한 문제가 의문투성이로 느끼는지 `그냥 산다`는 답이 의외로 많고 특별한 대답은 못 얻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삶이란 자체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삶을 만들어낸 현재의 환경이 삶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느낀다.
파스칼은 삶이 인생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환경을 강조했고, 니이체는 "현재 당신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따지는 미래보다 현재를 더 무게 있게 보는 것"이라 하였다. 중국민국의 우위를 위해 손문(孫文1866-1925)선생은 삼민주의(三民主義: 민족 민권 민생)를 통해 중국 근대화 혁명과 근대화 이념에 "차 한 잔의 미덕으로 민족정신을 바르게 잡는다"고 했다. 세계 자살 1위 국가로서 우리 국민이 먼저 풀어야할 과제이고 갈등의 물음에 답을 찾아야 함이 시급하다. 어느 자살자는 차 한 잔의 여유에 자살을 취소했다는 답을 듣고 단순한 생각에 삶의 의미를 창조하지 못했으나 차 한 잔의 짧은 여유가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고, 사는 개념을 새로이 적립시켰다.
아인슈타인은 "인생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삶에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지 못하면 거리에 날리는 낙엽보다 못하고, 청소 걸레보다 못하게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깜작 놀랄 과제이다. 과학기술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페이스북도 없으니 인간미도 없고, 품위도 없고, 연민도 없고, 수치심도 없고, 명예도 없고, 존경심도 없고, 개성도 없고, 사랑도 없고, 겸손도 없는 것 자체를 모르고 살았다.
그동안 의미 없이 오늘까지 살아온 과거 세대의 삶의 증거로서 헬멧을 쓰고 작업장에 가지 않았고, 학원 없이 스스로 숙제했다. 해질 때까지 들판에서 뛰놀고, 페이스북ㆍ카톡 친구가 아니라 진짜 친구끼리 놀았다. 목 마르면 생수가 아닌 샘물을 마셨고, 친구들이 사용한 잔을 함께 사용해도 아픈 적이 없었다. 빵, 과자를 많이 먹어 비만하지도 않았고, 브랜드 신발 없어도 맨발로 뛰어 놀았다. 그래도 항상 즐겁고 행복했다.
그러나 인생에 의미가 없다 보다 삶의 기(氣)가 필요하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묻기보다 `왜 사느냐` 의미를 청룡의 해에 묻고 싶다. 그러나 삶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인생은 의미를 갖고 사는 것 아니라 그냥 사는 겁니다. 삶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마라 그러면 또 하나의 굴레만 늘게 된다. 우리 인생은 길가에 피어 있는 한 포기 질경이 꽃으로 길가에 필 뿐이다. 그냥 살면 된다. "나는 특별한 존재다. 나는 특별해야 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자신의 하루하루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초조하고 불안하고 후회하는 것은 마음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알면 특별한 존재가 되고, 특별한 존재라고 잘못 알고 있으면 스스로 빈곤을 자초한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내려놓으면 인생의 길은 그때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다른 인생까지 피곤하다. 행복은 재력ㆍ권력이 아니라 마음 부자에서 나온다. 삶이 별 게 아닌 줄 알면 도리어 삶이 위대해 지듯이 봉사(奉仕)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이 생긴다. 청룡의 해 기대하는 성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