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06:21 (일)
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⑦
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⑦
  • 경남매일
  • 승인 2024.01.11 00: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제홍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김제홍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욕지도의 자부랑개에 다른 곳의 이주어촌과 마찬가지로 본국과의 연락을 위해 우편소를 설치하고, 일본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순사주재소, 그리고 이주민들의 자녀를 위해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가 설립되었다. 우편소, 주재소, 학교는 식민지 이주어촌이 조성되면 반드시 설치되는 주요 기관이었다. 기타 종교시설인 신사가 생기고, 주요경제기구로 어업조합이 결성되었다. 욕지어업조합 어판장에는 위판을 기다리는 어선들이 항상 포구에 가득 차 있었는데, 당시 부산어업조합과 대등한 위판실적을 자랑할 정도였다.

당시 초등교육기관을 살펴보면, 1895년(고종 32) 학무아문(學務衙門)이 학부((學部)로 재편된 후 학부에 의해 그해 7월 19일에 「소학교령」이 공포되어 소학교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1906년(고종 43) 8월에 통감부에 의해 「보통학교령」이 공포되어 기존의 조선인을 위한 초등 교육 기관인 소학교는 보통학교로 개칭되었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초등 교육 기관은 `심상소학교`로 칭하였다.

1924년 4월 23일, `원량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된다.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은 4년이고 8세부터 12세까지의 어린이를 입학시켰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수업연한은 6년, 입학연령은 6세 이상으로 했다. 또 수업연한 2년의 고등과를 둘 수 있게 하였다.

1914년에 설치된 욕지의 심상소학교에 1931년(추정)에는 고등심상소학교(2년과정)를 두어 중등부 교육도 담당했다. 욕지중학교가 설립되지 못한 시기에 원량 보통학교를 졸업한 몇몇 조선인 학생들은 고등심상소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했다.

자부랑개 마을 뒤편 언덕배기를 따라 주재소, 학교 우체국 같은 공공기관이 들어섰는데, 마을 내부와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장소에 관공서가 설치된 것이다. 더 위쪽 골짜기에는 주로 조선인과 일본인 하층민들이 거주하였다. 공공기관이 있었던 언덕배기와 해안가 사이에는 골목길이 있는데 골목길 양쪽에는 술집, 요리집, 당구장, 목욕탕, 상점 등이 줄지어 생겼다. 어선을 수리, 정비할 수 있는 철공소와 조선소도 들어섰다. 조선소는 자부랑개가 마을 건너편 입석리의 끝자락에 위치했는데 지금도 `욕지조선소`를 검색하면 바로 찾을 수 있다.

일본인들은 자부랑개의 해안을 매립하여 땅을 확보하고, 여기에 통행로와 물양장을 만들었다. 매립된 해안가의 도로를 따라 의용소방대, 선구점, 철공소, 잡화점을 비롯한 각종 상점이 들어섰고, 도로가 끝나는 포구의 서쪽 끝머리에 어판장과 어업조합이 있었다.

자부랑개는 남서쪽 동뫼와 북동쪽 곤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곤뫼라는 이름은 `곤피라신사`가 있었던 산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곤피라신사(金比羅神社)는 바다의 수호신 `사누끼 곤피라상(さぬきこんぴらさん)`을 모시는 곳이다. 일본 시코쿠 카가와현의 고토히라(琴平)마을에는 고토히라구 신궁(金刀比羅宮)이 있는데 여기가 곤피라신사의 총본산이다. 일본에는 `800만의 신`이라는 있을 정도로 다양한 신이 있고, 신사(神社)는 이들 신을 모시는 종교시설이다. 많은 신사 중 격이 높다고 인정받는 일부 신사를 신궁(神宮)이라고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