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22:14 (토)
이병철 회장, 후배 박태준에게 아호 '청암' 추천
이병철 회장, 후배 박태준에게 아호 '청암' 추천
  • 박광수 논설위원
  • 승인 2023.12.28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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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도전과길 15편- 박태준과 이병철

삼성그룹 최적합한 인재상 평가 받아
"사기업 대표 부적절" 사장 제의 거절
경영 철학 비슷… 잇단 위기를 기회로
지난 1977년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 포항 공장을 방문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 포스코
지난 1977년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 포항 공장을 방문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 포스코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자인 박태준 회장은 이미 알려진 대로 지난 1927년 경남도 동래군 장안면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부친인 박봉관과 모친인 김소순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2011년 12월 23일 별세한 자로 대한민국 철강산업을 일으킨 대부이다.

그는 6세 때 부친의 일본 이주로 인해 일본에서 초중등교육을 조센징이라는 놀림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학업에 집중해서 명문대학인 와세다 대학교 기계과에 합격한 인재이다.

1945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박태준 회장은 기계학 전문가로서 살아갈 상황이 전혀 마련되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파악하고 1947년 육군사관학교(옛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로 입학하여 1948년 소위로 임관하고 6·25전쟁의 치열한 전투속에서 살아남아, 5·16군사정변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당시 직함은 국가재건회의 의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후 1963년 육군소장으로 전역하고 만년 적자인 국영기업 대한중석 사장으로 취임해 1년 만에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대한중석을 흑자로 만들었다. 1965년 박정희는 "고속도로는 내가 직접 감독할 테니, 포항종합제철은 임자가 맡아"라는 말 한마디에 "예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포항제철 초대 사장으로 임명된다.

포항제철 건설 당시 불가능하다는 국내외 경제상황(1969년 kisa: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에서 대한민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은 채산성이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결론)에도 불구하고 박태준 회장은 1969년 완강하게 반대하던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대장상을 1주일에 3차례나 만나서 완벽한 일본어와 일본에서 학습한 경험을 살려 일본인의 문화적 특성과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는 능력을 발휘하면서 오히라 마사요시를 설득하여 마침내 자금유치(당시 16억 원 상당한 차관 유치)에 성공한다.

당시 청암은 "일본을 알고 잘 활용해 일본을 극복하자"는 지일, 용일, 극일의 3단계 일본 대응책을 강력하게 강조하면서 마침내 세계적인 우수기업 일본제철을 빠른 시일 내로 추월하는 놀라운 성과를 달성한다.

이러한 강한 군인 정신으로 뭉쳐진 박태준은 포항제철을 단기간에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건설하고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용광로에서 철이 흘러나오자 만세를 부르며 크게 기뻐한 모습은 아직도 대한민국의 사진 역사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박태준 회장의 군 근무 시기를 잠시 언급하면 과거 군시절에 얼마나 청렴 결백하게 생활했는지 당시 아주 허름한 집에서 전세를 살던 박태준 회장에게 집주인이 군간부가 초라하게 살면 안 된다고 하면서 지인에게 특별하게 부탁해 동네에서 가장 싼 전세로 집을 얻어준 사례가 남아 있으며, 또한 부사관이상의 간부라면 자택에 군용 모포를 한 개 이상은 갖고 생활했으나, 박태준 회장은 유일하게 갖고온 군수품은 반창고로서, 이유는 오래동안 농사를 짓느라 갈라진 어머니 김소순 여사의 손에 감아드리려는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갈라지고 터진 자신의 손을 보고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반창고를 감으면 상처가 잘 낫는다던데"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말을 우연히 들은 박태준 회장이 군대 반창고를 구입해 터진 어머니의 손을 감아 드려서 상처를 보호해 줬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청렴결백한 군인이었다.

군간부시절에도 원리원칙을 준수하고 군간부라면 누구든지 활용하던 군 당번병을 두지 않고 경비를 절감한 사실은 군모범사례로 전해진다. 이런 박태준의 모습을 지켜본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총애하면서 주요 지휘관 자리를 서슴없이 추천하고 발탁해 활용하고 비서실장으로 임명한다. 박태준의 일본 와세다 대학교 선배이기도한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 회장은 그의 출중한 업무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박태준을 여러 차례 만나 삼고초려를 하면서 삼성그룹이 설립한 삼성중공업의 초대사장으로 스카웃하고자 하였으나,박태준 회장은 국가기업의 수장출신인 자신이 영리목적으로 사기업 대표이사를 맡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정중하게 거절한다.

당시 삼성그룹의 사훈은 '인재제일'로서 이에 최적합한 인재가 박태준 회장으로 알려진다. 사실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 회장과 박태준 포스코 회장은 나이 차이가 17년이나 있었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상호 간에 형님 아우 하면서 아주 가까운 관계로 알려진다. 아호가 호암인 이병철 회장은 후배 박태준에게 아호로 '청암'을 쓰라고 권고하자 박태준은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며 감사의 마음을 표명한다. 따라서 '청암'은 이병철 회장이 박태준 회장에게 선물한 아호라고 볼 수 있다.

이병철 회장은 '사업보국'이라는 사명을 지었고, 박태준 회장은 비숫하지만 다른 '제철보국'이라는 휘호를 사명감으로 간직하고 철강산업에 매진한다. 그리고 삼성그룹의 경제위기가 왔을 때마다 호암 이병철은 박태준 회장을 자신의 회장방으로 불러내서 자문을 구하고 삼성의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으로 유명하다.

끝으로 이병철 회장 DNA 유전자를 백프로 물려받은 고 이건희 회장은 불량제품은 신체로 말하면 '암'이라고 표방하고 구미공장에서 생산한 수백억대의 불량휴대폰을 모아 놓고서 전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화형식을 치른 사례(향후 분발한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세계 1위 회사로 변신하고 매출이익 효자 제품으로 변신)도 박태준 회장이 과거 포항제철 건설 시 작은 공사 사고였지만 부실을 발견한 현장을 개선해 수리하지 않고, 전 직원들이 모인 앞에서 부실 건설 현장을 폭파한 사건(포스코 직원들 사이에서는 "섬뜩할 만큼 예리한 육감을 지닌 사람, 남의 눈에는 멀쩡해 보이는 것에서 불량을 발견하는 비정상의 눈을 지닌 사람으로 부르는 박태준, 그의 아주 독특한 감각은 부실공사를 추방해 미래의 큰 우환을 사전에 예방함)으로 불리어 질 정도의 사건으로 잘 기억하고 있던 이건희 회장이 이를 모방했다는 가설도 전해진다.

끝으로 청암이 즐겨 사용하던 어록 중에서 몇 자만 언급하면 "짧은 인생 영원 조국에", "사심없이 헌신하라. 무한 경쟁시대 일수록 필요하다", "자원은 유한 하지만 창의는 무한하다", "조상의 혈세로 지은 제철소이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 제철보국을 우리들 인생의 신조로 삼자", "신뢰를 얻으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 "향상 애국심을 갖고 일해달라" 등이다.

지금 살펴보면 '청암'과 '호암'의 아호가 닮았듯이 대한민국 경제계의 거상인 박태준과 이병철 회장은 경영 철학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고 필자는 판단하면서 포스코그룹은 살아서 영원하게 발전해 나갈 것을 당부한다.

기획·연재 박광수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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