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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대성동고분군에 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대성동고분군에 서서
  • 경남매일
  • 승인 2023.12.26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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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가락김해시종친회 사무국장
김병기 가락김해시종친회 사무국장

며칠 전만 해도 하늘 높이 뜬 방패연의 움직임을 따라 뛰놀던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던 대성동고분군에 요즘은 사람 그림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지구온난화로 영향을 받은 매서운 북극한파가 이곳에도 덮쳐 옷깃을 파고드는 칼바람에 집을 나서는 이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한 6곳의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맞추어 누군가는 '잊혀진 제국, 가야'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과연 그럴까, 지난 10월 12일 김해시는 대성동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시민보고회를 김해시청 대강당에서 성황리에 개최하면서 참석한 시민들에게 나누어 준 안내책자에 '대성동고분군 금바다(金海), 세계를 두드리다'를 넣었다. 목차에 이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요를 설명하고 그동안 추진과정 및 활동에다 세계유산 등재 의의 및 효과, 대성동고분군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계유산 후속사업 및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중에서 대성동고분군은 가야문화의 시발점으로, 대성동고분군을 3∼4세기에 낮은 봉분 형태로 나타난다(전성기)고 하면서, 나머지 6개 고분군은 5∼6세기 높은 봉분 형태로 나타난다(쇠퇴기)고 하였다. 2016년 9월 '가야의 뿌리Ⅱ'에 실린 신경철(부산대학교 고고학과 교수)의 '대성동 29호분과 일본의 하시하카고분' 논문에서 "대성동 29호분은 가야 최초로 조성된 왕묘가 틀림없다, 조성연대에 대하여 그 상한은 3세기 말로 확정지어도 좋다(신경철 1992)"고 생각된다는 주장과 겹친다.

그렇다면 대성동고분군은 3세기쯤부터 이곳에 살던 우리의 조상들이 마지막 안식처로 택한 곳이라는 말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는 김수로왕이 서기 42년 가락국을 건국하였다는데 1∼2세기까지 살던 조상들은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대성동고분군을 낮은 봉분 형태라고 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기준일 뿐이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고분군 주변은 약 3∼5m 아래로 논이 즐비했다. 백조아파트와 김해도서관이 들어선 곳도 흙을 메워 다진 곳으로 예전에 논이었고, 앞서 신경철의 논문은 명확한 근거도 없이 수로왕릉을 부정한 주장일 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다행스럽게도 대성동고분군을 1세기부터 5세기 후반까지 순차적으로 축조된 '야철 기술자의 땅' 가락국(금관가야) 왕권이 잠든 곳이라 하니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부터라도 김해시는 대성동고분군을 두고 3∼4세기로 국한하지 말고 그 연대를 1∼5세기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세계인이 찾는 세계유산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대성동고분박물관 이전도 고심해 보고 개발논리로 훼손한 주변 옛 대성동고분군의 영역을 되찾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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