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장서 변한 현대 미술 공간서 시간 여행
도살장서 변한 현대 미술 공간서 시간 여행
  • 경남매일
  • 승인 2023.12.1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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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현의 '안녕 프랑스'
툴루즈 가론강 따라 독특한 건물 만나
건축ㆍ역사 가치 인정한 국가 문화유산
'레 아바투아'서 '자코메티의 시간' 전
전후 시대 인간 존재 고민 조각 감상
프랑스 국가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현대 미술관 '레 아바투아'의 외관.
프랑스 국가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현대 미술관 '레 아바투아'의 외관.

옛 도살장에서 문화예술을 만난다면 어떨까. 프랑스 남서부 툴루즈의 가론강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저 멀리 독특한 건물이 하나 보인다. 바로 도살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현대 미술관 '레 아바투아 (Les abattoirs)'다.

19세기 지역의 공동 도살장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지난 1988년 문을 닫은 후, 건축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프랑스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만큼 건물 외벽에는 대칭적이며 기하학적인 19세기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특징이 돋보인다. '레 아바투아'는 2000년 프랑스 '지역 현대 미술관 (FRACㆍFonds Regionaux d'Art Contemporain)' 중 하나로 선정돼, 옥시타니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촉진하는 중심 기관의 역할을 맡고 있다.

옛 도살장이 문화예술 기관으로 탈바꿈 한데에는 당시 1990년대 프랑스 도시 재생 사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세기 산업화를 거점으로 생겨난 많은 공장이 점차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도시는 버려진 공간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도시의 중심으로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면서 생겨난 도심과 외곽 사이의 불균형 현상도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 바로 문화예술 도시 재생 사업이었다. 툴루즈를 중심으로 미디 피레네 (현 옥시타니) 지역의 문화예술 공간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이에 따라 툴루즈시는 낙후된 동네에 자리한 이 버려진 도살장을 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키기로 한다. 버려진 공간을 재활용하고, 낙후된 도시를 재생시키며, 문화예술 기관을 마련하며, 도시의 모든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한 셈이다.

이처럼 1990년대 프랑스에는 버려진 공간들이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활용되는 사례들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가 오래된 담배공장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생한 프랑스 남부 도시 마르세유의 '프리슈 라 벨 드 메 (Friche la Belle de Mai)'다. 지역의 문화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낙후된 지역을 활성화한 성공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레 아바투아'는 자코메티 재단과 협업 하에 내년 1월 21일까지 전시 '자코메티의 시간 (Le temps de Giacom

etti)'을 선보인다. 툴루즈시에서 스케치, 조각, 회화 등 약 100여 점의 작품의 대규모 전시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스위스 태생의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는 20세기 최고의 조각가 중 하나로, 국내에는 지난 2018년 예술의 전당에서 처음으로 자코메티 특별전이 개최된 바 있다.

특별전에서 선보이는 파리 자코메티 재단 소장 작품들.
특별전에서 선보이는 파리 자코메티 재단 소장 작품들.

자코메티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접근을 통해 전쟁, 학살, 핵 불안 등의 시대적 변화를 예술에 반영한 독특한 예술가다. 헐벗은 듯 길쭉하고 가녀린 인간의 모습을 담은 그의 작품들은 존재를 향한 끝없는 질문의 결과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특히 전쟁 직후인 지난 1946년부터 그가 생을 마감한 1966년까지, 시대에 대한 그의 성찰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에 주목한다.

초현실주의에서 실존주의로 그의 작품세계가 확장되는 배경에는 전후라는 시대적 상황도 있지만,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사무엘 베케트와 같은 실존주의의 거장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그들은 지적인 유대관계를 기반으로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몰락하는 시대의 인간성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전시 곳곳에는 주고받은 서신이나 협업한 작품 등 그들의 깊은 우정의 흔적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가 주목받는 것은 이러한 자코메티의 유명작들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뉴욕현대미술관 MoMA 소장품인 '걷는 남자 Ⅱ'와 자코메티 재단의 소장품 '키 큰 여자 Ⅰ' 또한 이번 전시에서 소개됐다. 2m를 넘나드는 큰 규모의 작품들이 미술관의 높은 천장과 만나 웅장함과 숭고함을 자아낸다.

자코메티의 '걷는 남자'를 모티브로 한 회화, 영상, 사진 등 다양한 장르의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들 또한 선보인다. 세대를 관통해 이어지는 인간 존재와 현시대를 향한 예술가들의 고뇌와 성찰이 엿보인다. 이를 통해 이번 전시는 단순히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예술이 현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 또한 제공한다.

'레 아바투아'에서의 자코메티의 전시가 의의가 있는 건 바로 이 점이다. 전후 시대에 인간의 고통과 애환의 기억을 간직한 자코메티의 작품이 19세기 산업화의 결과였던 도살장을 거쳐, 오늘날의 관객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자코메티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보면 전쟁, 산업화, 도시계획 등 현시대가 거쳐온 과거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예술 작품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자코메티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을까.

한지현 약력

△프랑스 아비뇽 대학교 문화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아비뇽 대학교 연극학 박사과정 △대한민국 정부 국비유학 장학생 △아비뇽 고등예술학교 근무 △아비뇽 페스티벌 축제 큐레이터 △현 프랑스 국립도서관 근무 △문화체육관광부 기자 △EBS 글로벌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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