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무경계'와 '서울의 봄' 참군인 김오랑
영화 '무경계'와 '서울의 봄' 참군인 김오랑
  • 경남매일
  • 승인 2023.12.07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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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근래 재미있는 영화 '무경계'와 '서울의 봄'을 봤다. '무경계'는 시사회에서 봤는데, 이 영화는 우리나라 국립공원의 산과 바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특수촬영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다. 독일 베를린·홍콩·두바이·인도 타고르 국제영화제 등 9개국 11개 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과 감독상, 촬영상 등을 받거나 후보로 올랐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고 아름다운 대자연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영화다. 이런 대자연을 보니 '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과 '大道無門 千差有路'의 의미가 와닿았다. 자연에서 빈손으로 와 지구에서 잠시 삶의 여행을 하고 다시 빈손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떻게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게 하는 영화였다.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에 있었던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다. 군인의 본분을 다하고자 하는 참군인들과 본분을 망각하고 권력쟁취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비한 군인들 및 무능한 관료들의 행태가 박진감있게 잘 나타난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니 참군인 김오랑의 삶이 반추(反芻)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고 온 제3공수여단 부대원들과 김오랑 특전사령관 비서실장과의 사이에 총격전이 있었다. 김오랑 소령은 권총으로 막았고 반란부대원들은 자동기관총을 난사하였다. 1:10의 전투였다.

쿠테타에 반대하는 정병주 특전사 사령관을 체포하려고 쿠테타군들이 쳐들어왔다. 특전사는 독자적인 병력동원이 가능하여 쿠테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반란군에 동조하거나 피신을 하라는 권유를 받고도 김오랑 소령은 진정한 군인정신을 발휘하였다.

김오랑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김해농고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제25기로 임관하였다. 김해농고 시절 "공책이 없어서 비료포대종이를 오려 묶어서 공책으로 사용하면서도 늘 당당하고 공부와 운동을 잘한 다부진 친구였다"고 동기들이 증언한다.

육사를 졸업한 1969년 강원도 양구 제2사단 수색중대에서 군인생활을 시작하였다. 1970년 7월 베트남에 맹호부대 소대장으로 파병되었다가 1971년 10월 귀국하였다. 육군 3사관학교 교관, 충남대 학군단 교관을 거쳐 1974년 특전사 제3공수여단 중대장으로 보직을 받은 뒤 주요보직과 5공수여단 부대장을 하였다.

1978년 12월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1979년 3월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을 맡았다가 국가를 보위하고 상관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반란군에 맞서는 군인정신을 실천하였다. 뛰어난 역량을 지닌 미래가 촉망되는 참군인이 반란군에 의하여 희생된 것이다.

시력이 약화되고 있던 부인 백영옥은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증세가 악화되어 실명이 되었다. 백영옥은 1962년 부산 봉래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부일 장학생'으로 경남여중에 진학한 수재였다. 고려대 법학과 재학 중에 월남전에 참전 중이던 김오랑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귀다가 결혼하였다.

백영옥은 남편의 고귀한 죽음과 명예를 바로잡기 위해 중령 진급과 무공훈장 추서를 위해 노력하여 1990년 김오랑은 중령으로 추서됐다. 부인 백영옥은 1991년 전두환·노태우·최세창·박종규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고 했던 그해 6월 28일 부산 자비원에서 의문의 실족사로 사망하였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12·12사건이 '군사반란'이란 최종판결이 나왔다. 군사반란 판결을 기념하며 김오랑 중령의 명예회복을 위한 추모기념식이 이 해 처음으로 열렸다. 맹호부대와 특전사에서 근무하다가 부상으로 전역한 뒤 김오랑 추모사업을 하던 김준철 씨가 2012년 이원준과 공저로 <김오랑-역사의 하늘에 뜬 별>을 발간했다.

2012년 김해 사람들이 김오랑 중령을 추모하는 '참군인 김오랑 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다. 2014년 1월 14일 '보국훈장 삼일장'이 추서되고, 그해 6월 6일 김오랑 중령의 모교인 김해시 삼정동 삼성초등학교 인근에 흉상이 세워졌다.

김오랑을 사살한 육사선배 박종규 중령은 하나회 숙청 당시 예편되어 어렵게 살다가 2010년 암으로 사망했다. 죽기 1년 전 '김오랑 기념사업회'에 전화를 걸어 "내가 지금 병고에 시달리는 것은 하늘의 벌로 생각되는데, 12·12에 참여했던 저와 저의 부하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12·12 군사반란에 저항하다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군인들에 대한 보상과 기념사업이 국가 차원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참군인으로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하다가 순국하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의 예우와 보상도 민주화운동 못지않게 중요한 일로 인식되고 다루어져야 한다.

우선 참군인 김오랑 중령의 동상이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건립되어야 한다. 반란군에 저항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세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에도 참군인 김오랑의 이야기를 실어서 바른 가치관과 국가관을 함양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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