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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⑤
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⑤
  • 경남매일
  • 승인 2023.12.06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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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1882년 한국과 일본 간의 ‘어업통상장정’이 체결되자 일본 대마도 근해에서 고등어 어업을 하던 일본 어민들이 부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부산 근해와 대마도 사이를 왕래하면서 5월 말~7월 초순까지 약 40일간 부산이나 거제도를 근거지로 어업을 하였는데, 발달된 어구로 하룻밤 사이에 2000~5000 마리를 어획하였다. 이렇게 잡은 고등어를 처음에는 조선인 사업자들에게 판매하였으나 1890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부산수산주식회사’가 생기면서 전량 이 회사에 팔게 된다. 고등어자반의 제조는 부산수산주식회사 창고 안에서 했는데, 배를 가르는 힘든 일은 조선인들 몫이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어업의 근대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1898년 4월 ‘원양어업장려법’을 공포하였는데 이 법이 일본인 어부들을 한국에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일본은 일본 어민의 모든 범법행위에 영사재판권을 편파적으로 규정한 조약을 조선 정부와 맺고 조선 어민을 조선 어장에서 내쫓았다. 가끔 일본군함을 조선 어장에 순항하도록 하여 권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조선 해안에 수십 명 단위의 일본인 집단 이주 어촌이 형성되었는데 이 어촌에서 주로 잡은 것이 고등어였다. 고등어 어업 근거지로 유명했던 일본인 이주 어촌은 욕지도 외에도 방어진, 감포, 구룡포, 거문도, 장승포 등이 있다.

1921년 일본 어민들은 조선인 어업자들과 함께 ‘동항리어업조합’을 설립했는데, 1932년에는 ‘욕지어업조합’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어업조합은 5만 엔의 조합자금을 바탕으로 어업자금을 조합원들에게 대출하고 어획물의 공동판매, 어구나 어업용품의 공동구매 등과 같은 사업을 했다. 조합설립과 동시에 공동판매소를 설치하여 이주한 일본인 어민들과 조선인 어민들이 이곳에서 어획물을 출하하도록 했다.

1929년 어업조합의 규모는 조합원 170여 명에 어획고가 100만 엔에 달했으며, 주요 어획물은 정어리, 삼치, 고등어, 장어, 멸치, 해조류 등이었다. 또, 어업조합은 별도로 전복과 고등어 통조림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1940년 4월, 조합원은 조선인 989명, 일본인 42명으로 총 1031명이었다. 초기에는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되었지만 점차 조선인 조합원의 수가 증가했다. 당시 조합의 어선은 565척이나 되었다.

1921년 기준으로 욕지도 동항리 연안에는 자부포, 불곡, 조선포, 동선리, 관청리 등 5개 마을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주로 자부포에 거주했다. 당시 인구를 살펴보면, 자부포 31호(135명), 불곡 50호(140명), 조선포 30호(150명), 동선리 50호(168명), 관청리 30호(140명) 등이다. 1920년대 이후 시코쿠의 카가와현 출신들의 이주자들이 급증하였다. 1930년 일본인 인구 98호 중 카가와현 출신이 59호로 가장 많았는데, 이들의 주요 업종은 ‘타뢰망(打瀨網)’이었다.

‘타뢰망’은 일본어로 우타세아미(うたせあみ)라고 하는데, 어민들은 ‘우다세 또는 우다시’라고 불렀다. 우리말 표준어는 ‘바람돛방’이고, 영어로는 ‘Sailing Trawl’이라고 번역된다. 타뢰망은 저인망의 전신으로 순전히 돛을 펼쳐 바람을 이용해서 항해도 하고 그물을 펼치고 끄는데, 피조개 같은 패류나 광어 같은 저서어류를 어획하는 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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