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운의 향방은 곧 경제와 화합에 달려있다"
"대한민국 국운의 향방은 곧 경제와 화합에 달려있다"
  • 박광수 논설위원
  • 승인 2023.11.27 2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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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도전과 길
13편- 정치인으로 보선 승리한 박태준

외환위기 극복 위해 국회의원 출마
포항시민 지지 7선 이기택에 압승
김대중 후보 선택은 '국운의 문제'
지난 1998년 3월 3일 박태준 자민련 총재(좌)가 조각 인선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우)를 만나 회동하고 있다.  / e영상역사관
지난 1998년 3월 3일 박태준 자민련 총재(좌)가 조각 인선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우)를 만나 회동하고 있다. / e영상역사관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방황하던 박태준 회장은 그동안 주야로 고생하며 건설한 포항제철이 김영삼 정권 아래에서 무력화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막기 위해 김영삼의 정적으로 활동하며 한동안 대응했으나, 일은 잘 풀리지 않았고, 결국 해외에 나가 4년의 유랑시간을 보낸다. 이 시기 동안 청암은 재기를 위해 해외에서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그 기회는 머지않아 다가왔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허화평(포항시 북구)은 김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에 의해 범죄 혐의를 입고,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게 돼 국회의원직을 잃는다. 얼마 후 이 소식을 일본에서 들은 청암은 출마를 결심한다.

그 시기는 지난 1997년 7월이었다. 그해 한국경제는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청암이 귀국해 거주하고 있던 포항의 기업과 근로자들은 무너지는 한국을 보며 두려움에 동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포항 시민들은 박태준을 바라봤다. 과거 그가 포항제철을 일으켰던 것처럼 포항시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시민들의 염원을 받아들인 청암은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그는 회상하길 자신이 출마를 망설였을 때 영정사진 속 박 대통령을 바라보자 사진 속 박 대통령은 자신에게 "임자 당장 포항 보궐 국회의원 선거로 나서게"라고 말한 것 같았다고 한다.

비록 선거운동에 나섰지만, 당시 칠순을 바라보는 적지 않은 나이였던 그에게 선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정치 기반이 없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 그는 사실상 정치적 인맥이 전무했다. 이러한 어려운 조건 아래에서 무소속 박태준은 무려 7선의 민주당 이기택과 맞붙어야 했다. 당시 이기택은 7선의 관록을 지닌 정치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김 대통령의 후광을 입고 있는 인물이었다.

청암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지지기반은 포항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확실히 약속할 수 있는 정치공약은 '포항의 부흥'이었다. 당시 청암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면 포항시를 전국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저를 뽑아 주시면 빠른 시일 내로 포항시를 대한민국 일등 경제도시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청암이 유세장을 방문할 때마다 외쳤던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처럼 단순한 말이지만, 그 말의 무게는 여타 후보의것과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포항 시민들은 그의 말을 믿었다. 그가 한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다. 포항 시민들은 '포항제철 기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포항 시민들은 청암이 포항을 부흥시킬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유세장에 나타날 때마다 '박태준'을 외쳤다.

포항 시민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선거에서 청암은 7선 이기택을 압도적으로 이기고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가 당선된 그해 12월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청암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어느 후보와 연대 할지 깊이 고민한다. 국회의원으로서 그의 주변에는 영남 출신 보수파 인사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정치적 수를 고려한 끝에 청암은 '화합'을 택한다.

그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 영남과 호남의 화합은 우리 시대의 요청이자 시대정신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말은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연대하겠다는 선언의 의미였다.

일찍이 국가부도의 사태를 예감한 청암은 이 시기 정치적 대립과 갈등은 곧 국운을 결정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화합'을 이뤄낼 수 있는 대통령 후보를 택했다.

이 화합의 결정적 계기는 김대중 후보의 구미시 방문이었다. 청암은 김대중 후보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인 구미시 상모동을 방문할 것을 조언했다. 이를 받아들인 김대중 후보는 박 대통령 생가를 방문했고, 이에 따라 그동안 갈라졌던 사람들의 화합 분위기는 크게 무르익을 수 있었다. 절묘한 정치적 수를 이뤄낸 김대중 후보는 그가 방문하는 곳마다 수많은 화합된 영호남인 지지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정치적 한 수가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크게 작용했음은 모두가 주지하는 바이다.

김대중 후보 선거캠프에서 청암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만약 김대중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 한국의 경제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하나하나 자세히 조언했다. 청암의 조언을 새겨들은 김대중 정권은 빠른 시일 내에 한국 경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전 세계인이 놀랄 정도로 빠른 시일 내에 외환위기를 극복한 한국, 우리는 여기에 숨겨진 청암의 공적을 기억해야 한다.

현재 박태준 회장은 현충원에서 영면하고 있지만 그가 이룩한 역사적 업적은 국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기획 연재 박광수 경남매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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