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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문의 '임나가라'는 어디일까
광개토태왕비문의 '임나가라'는 어디일까
  • 경남매일
  • 승인 2023.11.09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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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조희승이 저술한 <임나일본부 해부>와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책을 보면 임나는 일본의 기비지방(지금의 오카야마현과 히로시마 동부지역)에 있었던 가야소국이다. 이 책들을 보면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산과 마을, 강 등 여러지명이 기비지방에서 찾아진다. 또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임나관계 주역들을 기비지방의 옛 문헌과 지명 유적들에서 찾고 있다.

임나가 <일본서기>에는 200여 회, 815년에 편찬된 고대 일본의 성씨를 모은 <신찬성씨록>엔 10여 회나 등장한다. <일본서기>의 임나는 우리나라의 가야가 아니라 일본 기비지역에 있었던 가야인들이 세웠던 나라였다. 임나를 비롯한 가야소국은 여러 개가 있었다. 일본 북큐슈와 대마도에도 있었다. 이병선 부산대 명예교수의 주장처럼 가야인들이 세운 나라를 임나나 가라, 임나가라 등으로 곳곳에서 사용하였다.

1098년 일본에서 제작된 '난파팔랑화도(難波八浪華圖)'라는 지도에 야마토왜가 있었던 지금의 오사카에 '백제주, 백제군, 백제사, 신라주, 쿠다라강, 안라' 등의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도 '가라사와 가라교' 등 가야지명이 남아있다.

6세기 함안의 아라가야에 일본부의 역할을 하는 왜인이 있었다면서 <일본서기>의 '안라(安羅)'를 함안으로 비정하는데, 이 지도를 보면 <일본서기>에 나오는 안라는 함안의 아라가야가 아니라 오사카에 있었다. 아라가야 사람들이 일본에 세운 가야소국이 안라였다.

'가야=임나설'은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심상소학 국사보충교재>를 발행하면서 식민지 고토 회복이라는 침략의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가야가 임나라는 교육을 실시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의 '임나가라(任那加羅)'와 <삼국사기> '강수열전(强首列傳)'에서 언급된 '임나가량(任那加良)', 그리고 진경대사탑비에 언급된 '임나 왕족' 기록을 임나가 한반도에 존재하였다는 근거 자료로 선생들에게 가르치라고 한 것을 식민사학 카르텔의 역사학계가 그대로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근거를 학술적으로 극복한 연구들이 가야는 임나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지면 관계로 '강수열전'에서 언급된 '임나가량'과 진경대사탑비에 언급된 '임나 왕족'은 다음 칼럼에서 다루고자 한다.

한국지명학회 고문인 이병선 부산대 명예교수는 <한국 고대 국명 지명의 어원 연구>라는 책에서 "임나국은 실제로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일본 대마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30여 년간 일본 고대 신화와 일본 역사서를 섭렵한 국어학자로 현지 지명까지 조사해 이를 다시 어원과 음용학적 분석을 통해 결론을 내리는 분이다.

이병선 교수는 "옛날엔 주민의 이주로 동일한 지명이 여러 곳에 생겨나곤 한다. 대마도와 일본 본토에서 한반도의 지명이 널리 보이는 것은 이곳이 고대 한반도 주민의 이주지였기 때문으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고 한다. 광개토태왕릉비 '경자년조'에 나오는 임나가라는 대마도에 있는 좌효·인위·계지가라의 삼가라처럼대마도에 있었던 고유명사라고 한다.

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인 도명스님은 경남매일 칼럼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 25 최초의 임나, 대마도>에서 다음과 같이 비문을 해석한다. 광개토태왕릉비 <경자년조>에 "왜의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렀고, 쫓아가 성을 치니 성은 곧 귀복하였다"(倭背急追 至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 倭背急追는 "왜의 배후를 급히 추격한다"이며, 至任那加羅는 "임나가라에 이르러"라는 뜻이다. 종발성(從拔城)은 "쫓아가(從)" "성을 치니(拔城)"로, 城卽歸服은 "성은 곧 항복하였다"로 풀이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종발성'을 명사로 풀이하나 문맥에 맞지 않는다. 종발성은 "쫓아가 성을 치니"라는 동사로 풀어야 한다. 그 이유는 왜가 임나가라로 도망간 것은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고구려와 맞서 싸우려 했고, 그들은 뒤쫓아온 고구려군과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나서 항복했기 때문이다.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책에 "북큐슈 이토시마 가야소국의 군사력이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 신라를 한편으로 하고 백제 가야, 왜를 한편으로 한 조선반도의 풍운의 역사에 말려들어 갔고,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고국 가야 편에서 고구려, 신라와 싸운 왜였다고 보는 것은 이제 정설로 되었다. 일본학계에도 그것은 논문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야마토 왜는 6세기에도 큐슈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야마토 왜가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왜가 될 수가 없다. 그런데도 하나의 왜로 보고 '임나=가야설'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의 임나가라는 금관가야가 아니라 북큐슈 이토시마에 있던 가야계통 왜국의 일부인 대마도에 있었던 고유명사다. 그래서 임나가라를 금관가야라고 하는 것과 광개토태왕릉비의 왜를 야마토왜라고 하는 것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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