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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③
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③
  • 경남매일
  • 승인 2023.11.08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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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욕지 개척 당시 조선인 개척자들이 타고 온 배는 대부분 '떼배(뗏목배)'였다고 한다. 통나무를 장쇠(꿸대)로 꿰어 연결하여 고물에 멍에를 높게 걸어 통나무들을 고정하고 중앙에 노를 거는 노걸이를 설치하고 중앙에는 대나무로 만든 상자리(평상)를 설치하여 어구를 싣거나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돛대가 있어 바람을 이용해서 멀리 나갈 수 있게 했다.

돛은 베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주로 띠(다년생 풀)를 촘촘히 엮어서 사용했다고 한다. 떼배의 통나무는 주로 소나무를 사용했고 통나무를 연결하는 장쇠는 보통 이물(선수)쪽과 고물(선미)쪽 2곳에 설치했는데 주로 굴밤나무를 말려서 사용했다. 노는 단단한 재질인 너도밤나무, 가시나무 등을 주로 사용했다. 목수가 떼배 한 척을 만드는 데 약 10일이 걸렸다고 한다.

실제 욕지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어선은 '통구밍이'라고 불렀는데 통나무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통구밍이는 진해만 욕지에 이르기까지 통영근해에서 많이 사용되었지만 여수지방에서도 어선이나 해상교통수단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여수에서는 '통구미'라고 불렀다. 통구밍이는 외형상 가야시대의 배 모양 토기와 비슷하고 밑판이 U자형으로 평평하고 넓은 전형적인 한선((韓船)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선회능력이 우수하다. 선체저항이 커서 항행속도가 느리지만 돛이 달려있어 원거리조업도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조선 수군이 보유한 최초의 대형 다층 전투함인 판옥선도 통구밍이와 같은 평저형선(平底型船)이었다.

일본은 섬나라여서 선박기술이 발달했다. 어선도 견고하고 안정성이 높았는데 일본인들은 화선(和船)이라 불렀고 노와 돛을 모두 사용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선이라고 불렀는데, 구조는 통구밍이와 비슷하지만 종단면이나 횡단면이 둥글지 않고 흘수도 비교적 깊고, 속도도 빨라서 외해에서 활동하는 데 유리하고 사용목적에 따라 구조를 다양하게 바꿀 수 있었다. 목조로 된 소형 왜선을 전마선(傳馬船)이라고 하는데 일본어로 텐마부네(てんまぶね)다. 본선 과 해안 사이를 왕복하여 사람과 짐을 날랐다.

욕지도에 일본 어민들이 정착하면서 상인들과 운반업자들이 들어왔다. 1908년 시모노세키 출신 생선판매상이 자부포에 상점을 개설하고, 1910년 이후 가가와현의 운반선업자들이 들어왔다. 1909년 기준 욕지도의 일본인은 28호 101명이었고, 1910년에는 36호 199명으로 갑자기 늘어나니 일본의 지방정부와 관련기관에서는 욕지도 이민자들을 위해 주택을 건설했다. 1910년 아먀구치현 수산조합에서 욕지도 자부포에 주택 3동 14호를 건설했다. 이주민들은 주택뿐 아니라 일본 지방정부로부터 200엔 정도의 이주 보조금까지 받았다.

일본인 인구가 늘어나서 자부포에 일본인을 위한 시설과 관공서가 세워졌다. 1914년을 전후로 욕지도 심상소학교, 욕지도우편소, 순사주재소, 그리고 신사(神社)도 1곳이 설치되었다. 1915년에는 일본인 한지개업의(限地開業醫) 이와타나가(岩田長)가 상주하고 있었다.

한지의사(限地醫師)제도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자격을 갖춘 의사들이 부족하여 전국적 의료공백이 생기게 되자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일정한 시험을 통과하면 면 단위 지역에서 의료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병원 개업 자격을 주는 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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