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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모 겪으며 잇단 협상… 日총리 "인품이 협상 성공 이끌어"
수모 겪으며 잇단 협상… 日총리 "인품이 협상 성공 이끌어"
  • 박광수 논설위원
  • 승인 2023.11.01 2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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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편- 박태준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일본 안보 카드 제시하며 차관 도입
국내산 철강 수입액 30% 이상 절감
자동차·조선·전자 등 산업기초 세워
지난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왼쪽 선 사람).
지난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왼쪽 선 사람).

지난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제철소 건설로 국내 기간산업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선봉장으로 고(故) 박태준 회장을 초대 사장으로 임명한다. 이 선택은 정확했으며, 청암은 오늘날의 포스코를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시켰다. 포항제철소 입구 정문에는 청암의 친필로 기록된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말처럼 1960년대 청암은 당시 한국의 경제 여건상 불가능이라고 할 수 있었던 '종합제철소'를 특유의 발상 전환으로 건설했다.

원래 청암은 선진국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통해 제철소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선진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각국은 청암의 계획을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반대했다. 청암은 크게 실망했고, 박 대통령을 비롯해 한국 정부의 요인들의 심기 또한 크게 불편해졌다. 그러던 중, 청암은 문득 '대일청구권자금' 8000만 달러를 떠올렸다. 이 자금을 포항제철에 사용할 수만 있다면 포항제철 건설 또한 꿈과 같은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일찍이 일본은 이 자금을 한국의 농업 근대화를 조건으로 제공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청암은 당시 정부의 경제수석 비서관 출신의 경제기획원 장관이었던 김학렬과 합심해 일본의 내각을 상대로 끈질긴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청암을 비롯한 협상팀은 당시 일본이 납득할 만한 한 가지 제안을 했는데, 그것은 일본의 '안보'였다. 무장해제 상태나 다름없었던 일본의 입장에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는 이웃 나라 북한은 위협적인 존재였다. 협상팀은 바로 이 요소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한일 양국을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한국의 경제발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당시 일본 총리대신이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을 설득하던 청암을 회고하며 "박태준은 냉철한 판단력, 부동의 신념과 불타오르는 정의감, 깊은 사고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의 능력과 사람을 매료시키는 인품이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평했다. 나카소네의 말처럼 한국은 경제발전에 사용할 대일청구권자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청암은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 약 1억 2370만 달러 중 대일 청구권자금 약 6370만 달러, 일본 수출입은행의 차관 약 5000만 달러를 포항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조달했다.

이 과정에서 청암과 한국이 겪었던 수난과 느꼈던 모멸감은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것이다. 남으로부터 돈 한푼 받아내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이런저런 말 못할 고생을 하며 한국은 지난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소의 착공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안보 카드'를 들고 했던 일본에 대한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일본은 차관 외, 기술이전까지 추진했다. 신일본제철의 기술자들이 포항제철에 파견돼 기술적인 도움을 제공했으며, 1973년 6월 포항제철소에서 첫 번째 쇳물이 성공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청암은 미국, 유럽 등으로부터 받았던 무시와 수치심을 제철소 건설을 통해 그대로 날려버린 것이다.

지난 1987년 9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가 수행한 '포항종합제철의 국민 경제기여도 및 기업문화 연구'라는 논문이 있다. 여기서는 박태준 회장이 포항제철의 성공을 위해 왜 그토록 고생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만약 당시 한국이 철강을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이 아닌 국내 생산을 한다면 외국에서 철강을 수입했을 경우의 수입액에 대한 비용 절감액이 1979년에는 25.6%, 1982년에는 42.0%, 1985년에는 33.9%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만약 포항제철이 양질의 저렴한 철강제품을 국외산의 30% 내지 40%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지 못했다고 가정한다면, 당시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자동차 산업, 조선산업, 전자산업 등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박태준 회장이 포항제철을 건설하기 위해 세계은행에 차관을 신청했을 때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썼던 국제제철차관단의 일원인 지퍼 박사는 지난 1986년 박태준 회장과 다시 회동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당시 내가 쓴 보고서는 정확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바로 당신의 존재다. 박태준 당신은 누구나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는 업무를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단기간에 성공시켰다. 내 보고서는 물거품이 돼버렸다."

중국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은 지난 1978년 일본의 신일본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한국의 포항제철소 같은 제철소를 건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이나야마 회장은 "중국에는 박태준 같은 능력 있는 인재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덩샤오핑은 "박태준을 강제로라도 데리고 와야겠다"고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물론 청암이 그러한 제안에 응할 리는 없을 것이다. 청암은 "조국이 나를 버려도 나는 조국을 절대로 버릴 수 없다고"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명언은 청암이 어떠한 인물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박광수 경남매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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