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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②
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②
  • 경남매일
  • 승인 2023.11.0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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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일본인들이 욕지도에 정착하게 된 배경에는 어업에 편리한 입지조건, 어선과 운반선이 정박하기에 안전한 어항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특이하게도 섬이 제법 규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1887년 이전까지 민간인이 살지 않았기에 조선인들이 터전을 잡고 있던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착하기 쉬웠던 측면이 더 큰 요인으로 보인다.

욕지도 인근에는 통영과 부산 같은 거대 수산시장이 있을 뿐 아니라 거제도를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운송망이 형성되어 있어 어획물의 판매와 유통이 수월했다. 욕지도에서 잡은 수산물들은 마산항을 통해 만주와 중국의 대련까지 수송되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이점으로 욕지도는 어업근거지형 어촌으로 성장했다.

과거 1897년 기준으로 욕지도에는 일본어선 81척과 일본 어민 237명이 어업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조선인 인구는 15호에 불과했다. 1900년 이후 욕지도의 정황은 일본의 문헌에 단편적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구즈 슈스케(葛生修吉)의 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 1903년)에 따르면 당시 6개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자부포(좌부랑개)에는 4호가 있었고 통어조합연합회의 우편함이 설치되어 있었고 잠수기업자의 창고도 많았다고 한다.

'한국수산지(1910년 발간)'에 의하면 욕지도에는 읍동과 좌부랑포(座富浪浦) 2개의 마을이 있는데 그 주변에는 논과 밭이 많았다고 하며, 일본인 도미우라 가쿠다로(富浦覺太郞) 외 1호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사용하던 종래의 분기망을 개량하여 안치키(アンチキ)라는 어법으로 멸치를 잡았다고 한다. 어떤 어법(漁法)인지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일제강점기 요다끼(夜焚)어업이 성행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밤에 불을 밝히고 집어를 하면서 잡는 어법으로 보인다.

욕지도는 멸치잡이 어업과 잠수기 어업의 근거지였다. 성어기에는 운반이 수십 척씩 정박했다고 한다. 기업적 성격을 띤 어업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운영하였고, 자본이 부족했던 조선인과 일부 일본인들은 멸치잡이 어구와 어선을 빌려서 어획한 다음 총어획고의 40%를 자본주에게 제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어업에 종사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술을 습득해서 해방 후 어업기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어법에서 제일 중요한 각종 어구재료들이 기계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낚시도구, 그물, 밧줄 등을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었는데 일본인들에 의하여 낚시도구 제조기, 편망기, 로프제조기 등이 도입되어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일본인 이주가 증가하면서 여객 및 화물 수송을 위해 욕지와 통영을 오가는 정기항로가 개통되었다. 과거 1913년 욕지도와 통영 사이를 일주일 간격으로 운항하는 기선(大輪船)을 시작으로, 1920년에는 통영-욕지-남해 미조를 왕래하는 카이켄마루(海元丸)가, 1920년에는 통영-욕지를 오가는 여객선 지도리마루(千鳥丸)가 등장했다.

일본 어민들이 정착하면서 상인들과 운반선업자들이 뒤따라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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