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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
  • 경남매일
  • 승인 2023.10.26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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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필자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를 역사가 아닌 설화로 배우고 인식하였다. 그 연유는 낙랑국이 평양에 있으면 식민사학의 요체인 낙랑군 평양설이 부인되기 때문에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한 역사교육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분명한 역사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4월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를 유람할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를 만났다. 낙랑왕이 "자네의 용모를 보니 비상한 사람이다.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였다. 그와 함께 낙랑에 돌아와서 그의 딸을 시집보냈다.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가 낙랑공주에게 사람을 보내서 "만약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찢고 깨부순다면 즉시 내가 예로 맞이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군이 칩입하면 저절로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낙랑을 기습하기 위하여 이를 파괴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낙랑공주는 "몰래 무기고로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숴버리겠다"고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대무신왕에게 낙랑 공격을 권했고 낙랑왕은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아서 대비하지 못했다. 고구려군이 급습하여 성 아래에 이른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파괴된 것을 알았다. 그래서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했다.

그해 11월 왕자 호동이 자결했다. 호동은 대무신왕 두 번째 왕비 소생이었다. 호동의 어머니는 동부여 대소왕의 동생인 갈사왕의 손녀 소생이다. 용모가 잘생기고 왕이 매우 총애했다. 그래서 이름을 호동(好童)이라 지었다.

원비는 호동이 태자의 자리를 차지할까 봐 참소하기를 "호동이 소첩에게 예로 대하지 않고 음행하려 합니다"고 하였다. 왕이 "왕비는 호동이 다른 사람의 아이라 미워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비는 왕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장차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서 눈물을 흘리며 고하길 "청하옵건대 대왕께서는 몰래 알아보시고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없다면 소첩이 스스로 죄를 청해 벌을 받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대왕이 호동을 의심하여 죄로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혹자가 호동에게 이르길 "왕자께서는 왜 스스로 오해를 풀려고 않으십니까?" 하였다. 호동이 "내가 만약 오해를 풀고자 하면 어머니의 잘못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대왕께는 근심을 끼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이를 효도라 일컬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칼로 자결했다.

이로부터 5년 뒤 낙랑국은 대무신왕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고 낙랑의 백성 5천여 명이 신라에 와서 의탁함으로 6부에 나누어 살게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 유리왕 14년(서기 37년)' 조에 나온다. 이 역사 사실을 보면서 호동은 자신을 좋아해서 조국까지 버렸던 낙랑공주를 정략적으로 대한 것의 업보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동이 죽은 뒤 대무신왕 첫째 부인 소생인 해애루(解愛婁)가 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대무신왕 사후 해애루가 어려서 대무신왕의 동생이 민중왕이 되었다. 민중왕도 4년 뒤 급사하고 해애루가 모본왕으로 즉위한다. 모본왕은 백성들의 원성을 듣다가 신하인 두로에 의해 살해된다. 재위기간은 5년이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한 서술이다.

삼국유사에는 모본왕이 민중왕의 형으로 둘 다 대무신왕의 아들로 나온다. 일연스님이 어떤 사료(史料)를 참고한 것인가가 궁금해진다. 단군에 관한 기록은 <위서(魏書)>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밝혔는데 이 기록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에 의하면 모본왕이 대무신왕의 손자가 된다. 모본왕의 어머니가 대무신왕의 정비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면 모본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혹자는 호동왕자라고 한다. 그러면 대무신왕의 정비가 "호동이 소첩에게 예로 대하지 않고 음행하려 합니다."고 한 것과 "내가 만약 오해를 풀고자 하면 어머니의 잘못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고 한 호동의 말은 실제 사실을 인정하는 말이 된다.

모본왕은 중국 요서지역을 공략하였고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도 삼국사기에 나온다. 모본왕을 살해한 두로가 정권을 잡은 것도 아니고 하여 두로는 어떤 세력의 사주에 의하여 모본왕을 죽였다고 볼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중국에 대한 사대모화의 관점에서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역사서술은 어떤 사료(史料)를 참고하여 누구의 관점에서 기록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이 광개토대왕비에 적힌 기록이 아닐까? 그러면 모본왕은 호동의 아들이 되는 것인가?

우리 역사 서술은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하여 우리의 관점이 아닌 일본이나 중국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식민사관으로 우리역사를 서술한 이병도와 신석호가 해방후 역사학계를 장악하여 역사교과서를 만들고 역사선생들을 교육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우리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있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언제쯤 식민사학 카르텔을 극복하여 우리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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