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5:23 (토)
"각하가 생각납니다" 박정희 묘소 앞 과업 완수 보고하다
"각하가 생각납니다" 박정희 묘소 앞 과업 완수 보고하다
  • 박광수 논설위원
  • 승인 2023.10.25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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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 박정희 대통령에게 바치는 사부곡

청암, 25년 만 포항제철 대업 마무리 알려
박 대통령 피살 후 광양제철소 건설 전념
"잘사는 나라 건설 초심 잃지 않도록 매진"
지난 1970년 4월 포항제철 착공식을 마치고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이 포항제철 건설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지난 1970년 4월 포항제철 착공식을 마치고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이 포항제철 건설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박태준 회장의 포항제철 설립은 엄밀히 말하면 박태준 회장 본인의 의지와는 먼일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제철공장을 세우는 것은 '맨땅에 헤딩' 한다는 말과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황무지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집을 세우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청암은 해냈다. 그것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든든한 신뢰와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박 대통령은 청암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 계기는 청암의 사관생도 시절에서 만들어졌다. 박 대통령이 사관학교 교관이었을 시절, 학생들을 향해 일부러 난해한 탄도학 문제를 낸 적이 있었다. 그러고는 "누구 이 문제를 풀어볼 자가 없는가?"라고 말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교실의 생도들은 처음 보는 문제에 아무말도 못한 채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손을 번쩍 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청암이었다. 청암은 흑판 앞으로 당당히 걸어가더니 문제를 술술 풀어나갔다. 필자가 판단하건대 이러한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박 대통령 본인은 놀랐을 것이라고 본다. 어찌 됐든 이 사건을 계기로 박 대통령은 청암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암의 군인생활과 6·25 전쟁에서의 활약을 보고 그를 더욱 신뢰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청암을 줄곧 지켜본 박 대통령은 청암이 포항제철 건설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박 대통령은 청암에게 대한민국 건국 이래 전무후무한 프로젝트를 맡기면서 이 사업이 대한민국의 '미래의 등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실성이 높지 않은 이러한 사업에 대해 처음에 청암은 망설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여러 차례의 권고 끝에 이를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고는 박 대통령에게 공장 건설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불철주야로 일에 매진하고 노력한 끝에 지난 1970년 7월 포항제철소를 드디어 완공시킨다. 용광로에서 철강이 흘러나오자 박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만세'를 부른 사건은 유명하다.

박 대통령과 함께 한국의 거소사를 논하던 청암은 지난 1979년 박 대통령이 피살되자 큰 충격을 받는다.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운 적이 많았다. 다만 얼마 안 있어 마음을 다잡고 박 대통령과 약속했던 광양제철소 건설에 전념을 하고, 1987년 4월 28일 광양제철소를 완공하기에 이른다.

이후 한동안 포항제철 운영에 전념하던 박태준 회장은 1992년 10월 박 대통령의 묘소를 방문, 그동안의 과업을 보고한다.

그때 청암의 언급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업을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합니다." "한국의 빈곤 타파와 경제 부흥을 위해서는 포항제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각하의 의지가 지금 이뤄졌습니다." "어제 포항, 광양 양대 제철소에 조강생산 2100만t 체제의 완공으로 그동안의 대장정을 마무리했습니다." "1967년 9월 제가 영국으로 출장했을 때 각하가 저를 부르고 특명을 내리시며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어떤 고통이 오더라도 국가를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이 임자야." "부디 이러한 나의 생각을 살펴 임무를 완수하길 바라네." "이 말씀 한마디에 25년이란 긴 세월을 강철에 바쳤습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 왔는지 제 자신도 놀랍습니다."

"이 시간이 되니 솟구치는 감회를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불모지에서 용광로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39명의 직원을 이끌고 포항의 모래사장을 밟았습니다. '왜 나에게 이와 같은 불가능한 일을 시키는가'하고 각하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웃 선진국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을 때 받았던 냉대와 냉소에 모멸감과 수치심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력의 한계를 느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각종 언론의 조롱과 모략에 수모를 겪으면서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철강은 국력'이라는 각하의 집념이었습니다. 바쁜 업무 중 13차례나 현장을 찾아주신 각하의 관심과 격려가 힘이었습니다."

"포항제철소 4기 완공을 1년여 앞두고 각하께서 운명하셨을 때 그동안의 꿈이 무너지는가 생각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각하의 '철강입국'의 유지를 받들어 일어섰습니다." "그 결과 포항제철은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철강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각하의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얻을 수 있는 결과입니다." "지금 참으로 각하가 생각납니다. 그리움에 눈물이 납니다." "'임자 뒤에는 내가 있네, 하고 싶은 바를 소신껏 밀고 나

가게'라고 하셨던 말씀, 저에 대한 이러한 신뢰와 격려가 지금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각하께 약속드린 것처럼 과업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하면 된다'라는 각하의 정신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저 박태준이 흔들리지 않고 그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잘사는 나라' 건설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동안 자주 찾아뵙지 못한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삼가 각하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안면하십시오."라는 '사부곡(思父曲)'을 남겼다.

필자는 평생 충성을 다해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청암을 현시대의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광수 경남매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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