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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①
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①
  • 경남매일
  • 승인 2023.10.25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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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욕지도(欲知島)는 본섬을 포함 39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통영 육지와는 33㎞ 정도 떨어져 있다. 조선시대 말까지는 고성현(固城縣) 관할 아래 있었다. 과거 1900년 고성군에서 진남군이 분리되면서 욕지도, 두미도, 연화도는 먼바다에 있는 세 개의 도서지역이라고 원삼면(遠三面)으로 불리게 됐다. 1909년에는 용남군 원삼면으로, 다시 1914년에는 원삼면과 사량면이 통합되면서 통영군 원량면(遠梁面)으로 바뀌었다. 해방 후 1955년, 원삼면과 사량면이 다시 분리되고, 가장 큰 섬은 통영군 욕지면이 됐다. 1995년 시군 통합으로 지금은 통영시 욕지면이 됐다.

임진왜란 이후 통제영이 설치된 뒤로 욕지도는 통제영 소속의 사량진(蛇梁鎭), 당포진(唐浦鎭), 삼천진(三千鎭) 소속 군선의 변방 수색 및 초계 정박지로 활용되었다. 욕지도에는 통제영에서 관리하는 사슴목장이 있었는데, 매년 여름철 통제영 소속 수군들이 사슴을 잡아 녹용을 조정에 진상했다. 일본에서까지 욕지도를 시카시마(鹿島)라고 부를 정도로 사슴목장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조선 말기 욕지도는 궁내부(宮內府)의 명례궁(明禮宮)관할 아래 있었다. 명례궁은 왕실의 재산을 담당하던 곳이다. 1887년 명례궁에서 민간인 이주를 허가하면서 욕지도 개척 역사가 시작된다. 병선비장 유선달의 인솔 아래 풍화리의 김원일, 오비도의 김덕원, 거제도의 김신지 등 4명이 입도하여 장수나무 아래에 제단을 만들고 소를 잡아 개척제를 올렸다.

과거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되자 욕지도는 곧 일본 어민들의 어업근거지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다른 곳과 달리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가 동시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이한 사례다.

초기 욕지도에 이주한 민간인들은 챗배를 이용해 멸치를 잡았으며, 이후에 들망을 개발해 멸치를 잡았다. 이주한 일본인들도 챗배와 들망을 따라 했다고 한다. 챗배는 수심 깊이 그물을 펼치고 그 위로 멸치어군이 집어등에 모이게 하여 그물을 들어 올리는 어법이다. 어군을 흩어지지 않게 그물 안으로 유도하는 기술을 보유한 선원을 '불잡이'라고 한다. 들망은 분기초망이라고도 하는데 챗배와 비슷하다. 중층에 그물을 깔아 두고 물고기를 그 위로 유인하거나 지나갈 때를 기다려 그대로 떠서 들어 올리며 고기를 잡는 어법이다

일본 어민들이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연안어장이 수탈되기 시작했다. 일본 어민들의 한반도 근해 어로활등은 1889년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이 체결되면서 본격화됐다. 일본인 어부들 어업면허를 취득하고 어업세를 납부할 경우 조선 연해의 입어구역에서 자유로이 어로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복잡한 절차나 세금을 피해 밀어업을 하는 일본어선들이 더 많았다.

욕지도에 처음 들어온 일본 어민은 잠수기 어업자들이었다. 과거 1887년 4월 나가사키현 잠수기어업자 쓰카타 세지로(塚田淸次郞)와 사이토 센기치(齊藤善吉)가 욕지도에 잠수기 1대를 가져와서 시험조업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잠수기는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들여와 1870년대부터 어업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본래 잠수기는 서유럽에서 대형 선박 밑바닥 수리, 침몰선 인양 등에 쓰던 기술이었고 조개류 채취 같은 어업에는 이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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