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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철기와 다호리 고분과 밀양 교동 고분
가야 철기와 다호리 고분과 밀양 교동 고분
  • 경남매일
  • 승인 2023.10.19 22: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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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가야 유역에서 철기가 출현하는 것은 BC 4세기부터다. 이창희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의 <점토대토기의 실연대ㅡ세형동검문화의 성립과 철기의 출현연대> 논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야의 철 제품 품질이 중국보다 우수한 것은 양쪽의 끝부분에 탄소를 불어넣는 제련 공법이라고 한다. 이것은 고대 인도의 철 제련법과 같다고 한다. 호주 국립대의 <대만 초기 철기와 동남아시아 교역로> 논문에서 BC 4세기에 인도의 발달된 철 생산품이 대만에 전래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해로를 따라 가야에 전래되어서 철제련법이 같게 되었다는 것을 KNN에서 제작한 <과학으로 본 허황옥 3일 | 세계 최초 최장 결혼항해 '허황옥 신행길' 72시간을 과학으로 추적한다>를 시청하면 확인할 수 있다.

김수로왕이 허황옥이 오는 날짜를 알고 마중을 갔던 것은 이미 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철기문화도 발달되어 있었는데 이보다 앞선 BC 1세기 유적으로 철제품이 나온 김해 인근 유적지로는 다호리 고분과 밀양 교동 고분 등이 있다.

다호리는 경남 창원시 동읍 주남저수지 인근에 있는 저습 지대다. 총 44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철기류ㆍ칠기류ㆍ토기류가 주를 이룬다. 철기류로 철검, 쇠투겁창, 쇠꺽창, 쇠화살촉, 쇠도끼 등과 농기구로는 따비와 낫이 있다. 칠기는 중국과 다른 기법으로 독특하다고 한다.

지도자의 무덤으로 보이는 1호 목관묘의 널은 약 350년 된 지름 1m의 참나무 통나무를 세로로 쪼개어 속을 파낸 것이다. 1호 묘의 출토품은 철기와 청동기, 생활용품 등 26종 69점으로 출토유물로는 동검, 동경(거울) 같은 청동기와 오수전, 철검, 손칼, 부어 만든 도끼, 두드려 만든 판상철부 등과 쇠도끼를 비롯한 각종 철기제품이 많이 나왔다. 붓, 부채, 칼집, 활, 화살, 칠기와 민무늬토기, 와질 토기 등도 출토되었다.

출토된 중국 거울인 성운문경과 한무제 때 만들기 시작한 돈인 오수전 등으로 보아 서기전 1세기 후반의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성운문경은 밀양 교동 고분 3호 묘에서도 발굴되었다. 밀양 교동 고분은 22기가 발굴되었는데, 3호분 목관묘는 규모도 크고 성운문경과 함께 제례에 사용하는 'T' 자형 철기가 출토되어 지도자급 무덤으로 시기도 다호리 1호분과 비슷하다. 밀양 교동 고분군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고 종류가 다양한 유물이 철기다. 단조철부와 판상철부, 철착, 철겸, 철서 등의 공구류가 48점, 철검과 철모 등 무기류가 17점, 제의 용구인 'T'자형 철기가 2점 발굴되었다.

3점의 오수전이 다호리 1호 묘에서 발굴되었는데, 오수전은 BC 118년 한무제 때 만들기 시작한 돈이다. 다호리와 가까운 창원 성산패총과 사천 늑도, 경산 임당 유적, 영천 용전리 유적, 제주 산지항 등에서도 발굴되었다. 제주 산지항에서는 오수전 4점, 화천 11점, 대천오십 2매, 화포 1매 등 18점의 유물이 나와 지속적으로 중국과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호리 1호분 출토유물 중 붓 5자루와 손칼이 있는데, 이 붓과 손칼은 연필과 지우개 같은 문방구 역할을 한 것으로 교역시 영수증 작성에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의 "철이 나는데 한(漢), 예(濊), 왜(倭) 등지에서 이를 가져간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도 모두 쇠를 가지고 하여 마치 중국에서 돈을 가지고 쓰듯이 한다"는 기사를 보면 무덤의 주인이 철을 가지고 교역할 때 사용한 영수서 작성용의 필기구로 당시에 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붓은 약 23㎝ 전후로 길이가 모두 비슷하고 붓대는 흑칠이 되어 있으며 필간의 재질이 죽질이 아니고 붓털이 필간의 양단에 삽입된 것이 중국 붓과 다르다. 그래서 다호리 지역에서 직접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이 당시에 글을 사용한 증거다.

다호리 고분은 다양한 철기와 중국계 유물로 보아 철생산을 바탕으로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는 것을 알게 한다. 김수로왕의 가야 건국시 지도자인 9간과 밀양 교동 고분군의 지도자들도 글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김해와 밀양은 창원 다호리와 멀지 않은 인근 지역이다.

밀양 교동 지도자급 묘인 17호 묘에서 출토된 이체자명대경(異體字銘帶鏡 : 한무제 시기 만든 동경)에는 "內淸質以昭明, 光輝象而夫日月, 心忽揚而願忠, 然壅塞而不泄", "안으로 바탕을 깨끗이 하여 밝게, 광휘는 해와 달을 본받는다, 마음은 홀연히 충심을 기원하는데, 가득하여 씻겨 나가지 않는다."라는 명문(銘文)이 주출(鑄出)되어 있다. 글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글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한 역사교육으로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전설의 인물로 이 당시를 선사시대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김수로왕보다 앞선 시기에 우리 조상들은 글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발달된 철기문화를 지니고 외국과 교류를 하였으며 낫과 따비 등을 사용하여 농경 하고 있었다.

아직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는 고조선 시대의 유물을 선사시대로 표현한 것이 적지 않다. 우리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실증적으로 정리하여 교과서에 등재하고 바른 역사교육을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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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 2024-03-25 07:29:29
중국은 대만을 침공하지 않는다.
한반도와 대만 안보의 밀접한 연관성을 역사적 선례로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대만해협으로 미 7함대를 급히 이동시켰다.
중국은 미국이 있어 대만에 대한 무모한 전쟁은 없으리라 확신하면서 지금 우리의 여권은 중국과 대만과의 전쟁을 의식한 나머지 외치고 있는 소리이다.
지금 우리의 경제가 최악인 것도 중국 때문이다. 중국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중국과 감정 상하는 행위만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