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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성의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
이여성의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
  • 경남매일
  • 승인 2023.10.1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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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의 저자인 이여성(李如星)의 본명은 이명건(李命鍵)으로 경북 칠곡에서 만석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두전·김원봉과 의형제를 맺었는데 김두전은 약수(若水:물과 같다), 이명건은 여성(如星:별과 같다), 김원봉은 약산(若山:산과 같다)으로 이름을 지었다.

김약수는 부산 동래 출신의 초대 국회부의장으로 반민특위 해체 시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6·25 때 북한으로 가서 김일성 독재정권 수립 과정에서 두 의형제처럼 숙청되었다. 이들을 지금의 북한정권과 연결시켜 비난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잘못된 판단이다.

저자는 의형제들과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혜성단(彗星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3년간 감옥생활을 한 애국지사였다. 일본 입교대학 경제학과에서 공부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지평을 넓히게 된다. 만능 스포츠맨이면서 상상화의 대가로 역사화를 처음으로 그린 선구자이기도 하다.

필자는 초등교사·중등교사·특수교사·전문상담교사·직업기술교사 등의 교원자격증을 지니고 다양한 교육을 하였다. 학교 밖 청소년들의 성공적인 사회 진출 및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 국가사업으로 헤어미용사 맞춤형 직업훈련을 하는 내일이룸학교에서 미용사(美容史)를 교육하면서 이 책에 접하게 되었다.

조선복식고는 한국최초의 복식관계 저서로 복식학과 미용사의 필독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여러 복식을 통하여 우리 민족 복식의 기준을 세웠다. 역사에도 해박한 지식이 있어서 배울 것이 많다. 아래에 있는 역사관련 글은 조선복식고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상대 조선의 사서(史書)로 고구려 영양왕 11년 박사 이문진이 지은 <고구려유기> 100권, <신집> 5권, 신라 진흥왕 6년 거칠부가 지은 <국사>, 어느 때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와 근초고왕 30년 박사 고흥이 지은 <서기(백제서기)> 등이 있다. 어느 때 누구의 저서인지 모르는 <계림잡전> <해동고기> <삼한고기> <신라고기> <고려(고구려)고기> 등이 있고, 통일신라 경덕왕때 김대문이 지은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와 최치원이 지은 <제왕연대력> <신라수이전>, 진성여왕 4년 김영이 지은 <선기>와 연대와 지은이를 모르는 <삼국사>가 있다.

고려 숙종때 박인량이 지은 <고금록> 10권, <수이전>과 김청장이 지은 <김유신행록>, 고득상이 지은 <해동삼국통력> 12권과 <영시사>, 연대와 지은이를 모르는 <단군기> <동도성립기> <어법집 > <옥룡집> 등이 있다. 고려 숙종때 사관이 지은 <해동비록>, 김관의가 지은 <편년통록> <왕대종록>, 충렬왕 10년 원부·허홍·한강 공저인 <고금록>, 정가신이 지은 <천추금경록> 등이 있었으나 가석하게도 전부 훼멸 되어 버렸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이상국집>,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만 겨우 세상에 전하여, 조선고사 연구를 위해서뿐 아니라 동양사 연구를 위하여 참으로 영겁의 통한사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불행히도 유문(儒門) 출신의 존화사대주의자(尊華事大主義者)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를 대본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있는 것을 슬퍼할 뿐이다.

김부식은 존화가 극심하여 사술(史述)의 객관성이 손상되고, 우리의 고사를 경시하고 깎아내려 사료적 가치를 저하시켰다. 더욱이 문화사적 고유 자료를 멋대로 거칠게 추려 오랑캐의 것이라고 스스로 낙인 찍었으니 채록하는 것부터가 큰 수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치통감>과 <책부원귀> 등 중국사서를 인용하여 중국 사람들에게 알랑거리려 했으므로, 일반 사료로서도 익숙하지 않아 서름서름함이 많다. 복식 사료로서는 <잡지> 중 흥덕왕 복식 금령을 기재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자료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이유로 <신라고사> <삼한고기> <고려(고구려)고기> <선사> <화랑세기> 등이 <삼국사기>에 인용 서목으로 되어 있으면서 그렇게까지 깎아내려 버렸던가.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백 년 이상 뒤에 내었지만 <삼국본사> <왕대종록> <개황력> <영시사> <모고도> <신지비사> <단군기> <동도성립기> <옥룡집> <어법집> <대문류> <삼한집> <수이전> <안홍기> <향가> 등 삼국사기의 서목에 없는 옛 기록이 인용되어 있다. 이를보면 삼국사기 편술 당시에는 자못 자료가 풍부했음이 틀림없을 것임에도 그의 안중에는 보이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광망(狂妄)한 존화주의자였던가.

이 책에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인용하여 신라와 백제의 염직이나 방적 기능공이 일본 방적과 채색의 비조가 되었다는 내용도 있다. 저자의 지적처럼 삼국사를 사대모화가 아닌 주체적으로 편찬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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