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7:15 (토)
추석, 펜팔 동생 찾기
추석, 펜팔 동생 찾기
  • 경남매일
  • 승인 2023.10.03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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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늠 시인
백미늠 시인

'경주군 현곡면 무과리 419' 세월만큼 누렇게 변한 편지 봉투에 정성껏 눌러 쓴 볼펜 글씨. 진영이 펜팔 동생 하진이 주소다.

진영이가 33년 동안 간직한 까닭은 충분히 공감됐다.

지난 1991년 새해 첫날 감포 해돋이에서 만났을 때 진영이는 아버지를 여의었고 하진이도 투병 중이던 엄마를 잃었다.

"진영아, 너 펜팔 친구 찾으러 오늘 경주 가볼까…." 추석 연휴 4일째다.

경주의 하늘은 천마총의 딱 그 하늘과 구름이다.

'현곡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이정표에 출발부터 쉴 새 없던 수다가 딱 멈췄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손을 쑥 넣어 보고 싶은 낮은 하늘 아래로 천년의 미소 신라지만 어디라도 비슷하고 낯익은 시골풍경이 펼쳐졌다.

"이필이 집사님 안녕하세요. 김하진이 숙모님 되시죠?" "아줌마는 누군교? 어디서 왔는교? 하진인지 하정인지 누군지 나는 모르겠고…."

"이 번호는 어떻게 알고 했는교?" "무과교회 목사님이 알려 주셨어요. 동네 분들이 하진이 숙모가 무과 교회 다닌다고 하셨어요." 목사님에게서 연락처를 받았다고 하니 믿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아줌마는 지금 어디서 전화하는교? 교회 앞이라고? 차 갖꼬 왔는교? 그라믄 길가로 나와서 우쪽에 공굴 지나서 집이 보이는 데로 들어와 보소." 하진이가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우리는 냉큼 달려갔다.

황금빛이 감도는 논을 지나고 굵어진 감으로 축축 처져 있는 감나무 밭을 지나자 진초록 들길 사이로 스쿠터를 탄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오고 있었다.

"창원에서 여까지 왔는교. 밥이나 먹구로 우리 집으로 따라 오소." 무작정 앞장을 섰다.

둥글 넓적한 붉은빛 얼굴은 팔십은 족히 넘어 보였다.

뽀글뽀글 명절 파마를 하고 뱅글뱅글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허리에는 복대를 하고 슬쩍슬쩍 우리를 살피는 눈빛과 야무진 말투가 총명해 보였다.

"내가 허리 아파 차려 주지는 못하요, 밥솥에 밥도 많고 냉장고에는 반찬도 많으니 맛이 있으나 없으나 다 꺼내서 먹으소. 담아 놓은 물김치도 있으니 얼마든지 자시고 설거지만 해 놓고 가소." "아들딸 낳고 마누라와 잘 살고 있는 하진이를 와 찾는교. 앞으로도 찾을 생각 말고 집에 가서 남편하고 자식하고 행복하게 잘 사소." 자초지종을 귀담아 듣지도 않더니 80년 인생을 살아온 경륜과 경험은 단호했다.

"나는 글도 모르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우리 아들 폰 번호도 모르오, 하진이는 그때 엄마 돌아가시고 바로 입대해서 지금까지 제대 안하고 같은 군인 여자랑 결혼했소. 아도 셋이나 낳았지, 고향에는 잘 안 오요." 30년도 더 지난 편지봉투를 들고 무작정 찾아온 여자들이 밉지는 않았는지 근황을 알려 주었다.

혼자 사는 시골집이지만 넓고 깨끗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아들이 부족할 새 없이 철철 넘치게 해 준다고 했다.

"아들이 오면 물어볼 테니 주소나 적어 놓고 가소." 여러 번의 허리 수술과 당뇨, 고혈압에 나이가 들어도 손맛은 변하지 않는 듯 명절 음식이 깔끔하고 깊은 맛이 있었다.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나물에 보리밥을 넣어 비벼 먹고 송이버섯 불고기도 먹고 커피까지 끓여 마셨다.

진영이는 자기 주소와 연락처를 괄호 안에 개명한 이름까지 큼직하게 쓴 종이를 눈에 잘 띄는 곳 여기저기에 붙여 놓았다.

기어이 담아주는 물김치 봉지를 하나씩 받아 나오려는데 축복기도를 해 주셨다.

뜻밖의 환대가 얼떨떨하지만 감사하고 또 뵐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꼭 안아드렸다.

"3년 동안 펜팔 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연락이 끊어져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잘 살고 있는거 확인해서 마음이 놓인다. 연락이 안 와도 충분해." 오랫동안 실행하지 못하던 '진영이 펜팔 동생 찾기' 미션을 성공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꾸 터지는 웃음은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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