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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선택 ⑦
우리의 선택 ⑦
  • 경남매일
  • 승인 2023.09.25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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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 한전·한국중공업 사장
박정기 전 한전·한국중공업 사장

1만 7000여 명의 사상자와 비전투요인(추위, 동상)에 의한 손실도 7400명에 달했다. 중공군의 사상자도 5만여 명이 넘었다.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 사단은 무려 9개 사단에 연인원 180만여 명이었다. 그중에 특별한 사단이 하나 있다. 미 제2보병사단이다. 사단 창설은 세계 1차대전 중인 1917년 9월 21일 프랑스 파리에서였다. 사단 역사 100년 기간 중 한국 주둔이 71년째다. 미국 사단이 아니라 아예 우리 향토 사단이다. 1950년 8월 한반도에 파견된 이래 지금까지 동두천에 남아있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많이 싸운 사단도,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단도 미 제2사단이다. 별명은 전사사단(Warrior Division) 또는 Indian Head. 모토는 'Second to None(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미 제2사단이 처음 배치된 곳은 낙동강 하류 창녕지역 박진 나루터였다. 마침 인천 상륙 직전이라 대부분 병력이 상륙부대로 차출돼 낙동강 교두보는 병력이 부족할 때다. 담당 정면 5㎞, 정상 정면의 5배다. 박진 나루터를 맡은 부대는 2사단 23연대, 8월 9일 23연대는 북한군 제4사단의 총공격을 받는다. 창녕에서 부산을 진격해 대구 일대의 연합군을 고립시키려던 북한군의 최후 공격이었다.

23연대는 1개 사단을 상대로 사투를 벌였다. 연대의 중대장들이 한 사람도 안 남고 전원 전사했다. 어떤 중대는 중대장이 3명 이상 보충됐다. 연대병력의 2/3가 희생된 것이다.

결국 북한군의 공격력이 약화하면서 북한군 4사단도 탈진했다. 낙동강 교두보가 하마터면 뚫릴 뻔했다. 23연대의 선전이 없었으면 교두보 내의 유엔군과 한국군의 운명이 어떻게 됐을까?

매년 11월 30일 저녁이면 자기 부대기를 불태우는 부대가 있다. 바로 미 제2사단 공병대대다. 대대는 1950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군우리에서 중공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전멸의 위기를 맞았다. 대대장 자켈레(Alarich Zacherle) 중령은 '우리는 죽어도 군기는 뺏길 수 없다'라는 각오로 부대기가 들어 있는 상자를 불태웠다. 중공군이 부대 깃발을 마음대로 휘날리는 치욕을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기 행사는 그때를 잊지 말자는 다짐이다.

공병대대가 위기에 빠진 것은 2사단 본대가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했을 때, 사단장이 공병대대가 사단의 최후방을 맡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미국 공병은 전통적으로 전투를 잘하는 부대이다. 철수 작전 때 공병대대는 최후방에서 제일 힘든 싸움을 했고, 천신만고 끝에 포위는 빠져나왔지만, 부대원 977명 중 생환한 사람은 266명에 불과했다. 자켈레 대대장은 포로수용소에서 2년 반을 보내다 귀환했다.

미국은 한국전쟁 3년 동안 연인원 178만 9000명을 한국에 보냈다. 많이 보낸 만큼 인원 손실도 컸다. 육군 전사자 3만 6940명, 부상자 9만 2134명, 공군 전투기 400대, 전사 2000여 명으로 연합국 중 최대 피해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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