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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선택 ④
우리의 선택 ④
  • 경남매일
  • 승인 2023.09.04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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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 한전·한국중공업 사장
박정기 전 한전·한국중공업 사장

희한한 일이다. 왜 전방사단이 일제히 휴가를 내보냈던가? 그뿐이 아니다. 24일 토요일 저녁 육군본부 장교클럽에서는 댄스파티가 열렸고, 파티는 밤새 계속됐다는 것이다. 이 파티에는 육본은 물론 수도권 장교들도 다수 참석, 육본의 참모총장, 주요 참모들은 적이 쳐들어왔을 때 대부분이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연락을 받았다. 휴가를 보내고 파티를 연 게 다 북한의 공작이었다.

그러나 오직 6사단만은 사단장의 예외적인 조치로 휴가는 고사하고 경계를 한층 강화하고 있었다. 6사단과 맞붙은 적은 인민군 2사단과 12사단이었다. 이때 김종오 장군의 용병술도 훌륭해서 적은 6사단 진지를 짓밟지 못했다. 6사단이 현 전선에서 버티는 바람에 북한군의 작전에 차질이 생겼다.

서울과 강릉 쪽은 예정대로 깊이 내려왔는데 춘천이 안 무너지니 일단 전진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적이 서울에서 한강을 바로 도하, 공격을 속행하지 않고 3일 동안이나 머무적거린 것도 6사단의 공헌이 크다. 이 3일 동안이 대한민국을 살린 중요한 시간이 됐다. 미군의 즉각적인 참전 결정과 UN에서 북한군의 침략군 규정 등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대한 결정들이 이때 이뤄진다.

한국전쟁에서 특기할 사항은 학도병이다. 임진란 때 의병과 같이 서울 시내 각 학교 학도호국단 간부 200여 명이 최초로 수원에 모여 자진 입대했다. 이들은 교모와 교복을 입은 채 낙동강 전투부터 북진할 때까지 계급도 군번도 없이 종군했다. 전쟁에 참여한 학도병은 총 2만 7700명에 이르렀다.

트루먼의 참전 결정은 우리에겐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27일엔 해, 공군에게 출동 명령과 북한의 해상봉쇄령을 내렸다. 한편 주미대사 장면의 빠른 행보로, 6월 27일 UN 안보리 이사회는 북한을 침략자로 결의했고, 7월 7일에는 주일미군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를 사령관으로 하는 UN군을 조직했다. 7월 8일에는 UN 깃발이 처음으로 전장에 나타났는데 당시 참전국은 16개국에 달했다.

미 육군의 최초 참전부대는 스미스 기동부대(Smith Task Force)였다. 이 부대는 포병 1개 포대를 증강한 보병 대대로 대전차 화기로는 105밀리 야포와 2.3인치 바주카포밖에 없었다.

7월 4일, 이들은 경기도 오산 죽미령에 배치돼 북한군 4사단과 맞붙었다. 미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였다. 앞서오는 전차를 105밀리 야포가 때렸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철갑탄 아닌 고폭탄을 썼기 때문이다. 2.3인치 바주카도 효과 없기는 마찬가지. 더구나 상대는 20대의 전차에 1개 사단 병력이다.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싸움이었다. 55명 대원 중 1/3은 전사, 1/3은 포로가 되고 나머지는 활로를 뚫고 도망쳤다. 대대장 스미스 중령도 겨우 목숨만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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