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8:39 (토)
주식 단 1주도 보유 안해…"공적인 일할 때 사욕 갖지 말아야"
주식 단 1주도 보유 안해…"공적인 일할 때 사욕 갖지 말아야"
  • 박광수 논설위원
  • 승인 2023.08.30 2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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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도전과 길
5편- 박태준 회장 제철소 완공과 청렴 경영의 시작

'내가 하면 된다', 모래벌판에 제철소 완공
현장 하자 발견하자 폭탄으로 바로 폭발시켜
"청결은 제품의 질과 안전으로 연결" 철학
1968년 9월 10일 직원 주택단지 착공식 모습. / 포스코
1968년 9월 10일 직원 주택단지 착공식 모습. / 포스코

대한민국 경제계의 거목인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은 여러 분야에서 성공하며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군인 출신으로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고 지난 1964년 12월 국영기업체인 대한중석을 맡아서 부정부패와 비리를 척결하며 1년 만에 대한중석을 만년 적자 회사에서 흑자 회사로 만들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성공한 사람들(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은 있었지만 정치와 경제 및 군사 분야의 '인생 3관왕'으로 성공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은 아마 청암 박태준 회장 한 사람뿐일 것이다.

대한민국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유일한 사람 또한 아마 박태준 회장일 것이다. 그는 1960~80년대에 걸쳐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인 제철소 건설을 3년 3개월 만에 이루어 세계가 인정하는 제철 신화를 써 내려간 사람이다. 제철소 건설에 대한 아이디어는 박 대통령이 낸 것이지만, 이를 실천에 옮겨 저렴한 비용으로 완공시킨 사람이 박태준 회장이다.

그 당시 박 대통령이 포항에 제철소를 건립하겠다고 발표하자 각각의 언론사들이 반대 성명을 냈다. 농업 기반 국가가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반대를 위한 여론몰이용 기사가 신문을 도배했을 정도로 극심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내 일생 조국을 위하여'라는 표어처럼 대한민국의 선진국 진입을 위해서는 중화학공업을 반드시 육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불처럼 타오르는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제철소 건설을 추진한다. 그리고 박태준 회장을 청와대로 부르고 "자네가 즉시 포항으로 내려가서 제철소 건설을 하라"고 지시한다.

포항에 도착한 박태준 회장은 현장 답사를 하며 사실상 모래벌판인 포항 영일만에 제철소를 건설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직원들을 모집한다.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것이었다. 당시 포항제철소 부지를 찾은 박 대통령도 모래사장을 바라보며 과연 이곳에 제철소가 건설될지 약간 회의하기도 했었다고 전해지나, 박태준 회장을 굳게 믿고 제철소 건설 사업을 지지한다. 직원을 모집한 후에는(당시 38명의 직원은 제철소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즉시 아파트 건설에 착수한다.

모집된 직원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숙식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건설할 때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여론의 아파트 공사에 대한 비난이었다. 여론은 박태준 회장이 아파트를 통해 주택 장사를 하는 것이라고 공격을 퍼부었다. 이전 제철소 건설을 위해 빌린 자금이 엉뚱한 곳으로 투입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암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직원들을 위한 아파트 건설을 꿋꿋이 밀고 나갔다. 직원들은 그러한 박태준 회장의 마음을 알았는지 향후 제철소 건설 사업에 있어서 더 없을 38명의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박 대통령의 신임과 직원들과 함께 불철주야로 일한 덕분에 제철소는 완공될 수 있었다. 용광로에서 제철이 성공적으로 나오자 박태준 회장은 그 모든 공을 동거동락한 부하직원들에게 돌렸다.

제철소 공장 건설 시 박태준 회장은 워커를 신고 하루에도 현장을 수십 차례 누볐다. 그 결과 그의 워커는 6개월도 안 돼서 못 신을 정도로 금방 닳았다. 이는 그가 현장의 자그마한 부실조차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만큼 분주히 뛰어다녔음을 의미한다.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면 1977년 8월 박태준 회장은 공정률이 80%에 이르던 현장의 부실공사를 확인하고, 전 직원들을 모은 후 직원들 눈앞에서 그 현장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켰다. 이미 상당한 자금이 들어간 현장은 다이너마이트에 의해 재가 됐다.

1977년 8월 2일 발전송풍설비 불량을 확인하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폭파하는 모습. / 포스코
1977년 8월 2일 발전송풍설비 불량을 확인하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폭파하는 모습. / 포스코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눈에 칼이 들어오는 상황이 발생해도 나는 부실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여러분들도 이를 명심하고 현장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꺼진 불도 다시 본다는 각오로 두 번 다시는 부실공사를 하지말라".

"대한민국의 백년대계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폭파가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폭제다."라고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당시 건설 담당 직원들은 현장에 작은 하자만 있을 뿐이므로 보강공사를 통해 건설을 계속 진행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청암은 작은 하자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엄격하고 치밀한 건설 과정이 있었기에 오늘날 포스코 공장은 단 한 건의 가동사고가 없는 공장으로 알려져 있다.

박태준 회장이 제철공장 현장을 누비고 다닐 때의 또 다른 실화를 잠시 언급하면 그는 포스코 직원들에게 '청결'의 덕목을 늘 강조했다고 한다.

청암의 '공장관리 원칙 1호'는 바로 '목욕론'이다.

다시 말해서 목욕으로 몸을 청결히 유지하는 직원은 사물을 잘 정리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는 업무에 있어서 제품관리 및 안전의식과 관련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직원기숙사를 불시에 방문할 시 항상 목욕탕을 먼저 가 볼 정도로 목욕을 강조했다.

1972년 10월 3일 첫 열연코일에 기념 휘호하는 박태준 사장. / 포스코
1972년 10월 3일 첫 열연코일에 기념 휘호하는 박태준 사장. / 포스코

박태준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목욕을 잘해서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직원은 주변의 지저분한 것, 바르지 못한 것, 정리·정돈되지 않은 것들을 못 본 채 할 수 없다. 깨끗한 몸은 현장 안전과 제품의 질로 표현된다".

이러한 철학 때문에 지난 1980년대 초 그는 모든 공장과 직원 숙소에서 호텔 수준의 목욕탕과 화장실을 갖추도록 해마다 수십억 원씩 투자했다. 현재 그는 세상에 없지만 지금도 그의 청결 철학은 포스코에 흔적으로 남아있다. 주지하듯이 포스코와 관련한 시설의 세면대와 목욕탕 등은 특급호텔과 같은 수준으로 이뤄져 있다. 이는 타사가 부러워하는 포스코의 일면이다.

청렴과 관련해서 청암 본인에 대해 얘기하자면 아마도 한국의 기업인 중 그처럼 청렴결백한 사람은 향후 쉽게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의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박태준 회장은 25년 동안 근무했던 포스코 회장직에서 물러날 때 자신의 주식과 퇴직금을 회사에 기부했다. 포스코가 상장할 때 우리사주를 받은 포스코의 초창기 멤버들은 모두 크게 부자가 됐으나, 청암은 무사욕의 리더 역할을 철저히 실행했던 것이다. 박태준 회장은 포스코의 주식 단 1주도 보유하지 않은 한국의 유일한 오너이자 회장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다.

청암은 포스코의 명예회장으로 복귀한 뒤 직원들이 "노후를 생각해 조금이라도 스톡옵션 주식을 받으시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포항제철은 선조들의 피의 대가로 세운 회사다. 공적인 일을 할 때 사욕을 갖지 말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필자는 앞으로 이처럼 청백리에 빛나는 사람은 한국에서 더 이상 나오기 어려운 유일무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기획 연재 박광수 경남매일 논설위원>

박광수 경남매일 논설위원
박광수 경남매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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