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6:30 (토)
공장 완공까지 임직원과 숙식하며 건설현장 곳곳 누벼
공장 완공까지 임직원과 숙식하며 건설현장 곳곳 누벼
  • 박광수 논설위원
  • 승인 2023.08.24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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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도전과 길
4편- 포스코 발전시키고 철강왕이 된 박태준

박 대통령 "동생 태준이만 믿고 맡겨"
모래바람과 싸우며 하루 3시간 취침
불굴의 정신으로 조속한 건설 다짐
청렴한 삶 유지 병원비 마련도 힘들어
지난 1970년 4월 1일 만성적인 빈곤 추방과 자립경제 달성이라는 염원 품은 포항 1기 종합 착공식에서 박정희(가운데) 대통령과 김학렬 부총리가 박태준(왼쪽) 사장과 함께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 포스코
지난 1970년 4월 1일 만성적인 빈곤 추방과 자립경제 달성이라는 염원 품은 포항 1기 종합 착공식에서 박정희(가운데) 대통령과 김학렬 부총리가 박태준(왼쪽) 사장과 함께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 포스코

박태준 회장은 일본에서 와세다대학 기계과 2년 재학 중 1945년 해방된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온다.

당시 대한민국은 시국이 어수선하고 경제구조가 농업 위주인 빈곤국가였다. 일자리를 못 구하던 박태준 회장은 호구지책으로 조선경비학교(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됐으며, 그곳에서 육군 대위로 복무 중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당시 교관이던 박정희는 수리학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면서 군사학에도 뛰어났던 사관생도 박태준에 관심을 갖는다.

박태준 회장은 소위로 임관 후에 6ㆍ25전쟁을 겪으면서 여러 전투(예를 들어 미아리 전투에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10명의 부하 중 2명만 살아남으면서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지연시킴)에서 살아남았고, 육군본부의 긴급 지시에 따라 남은 부하들을 데리고 어쩔 수 없이 한강 이남 시흥으로 철수한다. 박태준 회장은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탁월한 작전 능력을 발휘하며 승리했고, 수많은 무공훈장을 받아 군 동기들보다 빠르게 진급한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한 5ㆍ16 군사정변 이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다.

군사정변으로 부패한 정부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박 대통령은 당시 국민소득의 면에서 북한, 필리핀보다 낮은 1인당 100달러도 안 되던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고자 마음먹었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정신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 및 추진한다.

박 대통령의 생각으로는 한국의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중화학공업을 빠른 기간 내로 성장시켜야 했다. 따라서 당시 `모든 산업의 쌀`이라고 일컬어지던 강철을 생산할 수 있는 제철소를 건설해야 했고, 이를 즉각 실천한다. 물론 제철소 건설의 아이디어는 서독 방문 시 서독정부 인사들의 조언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대통령은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제철소 건설에 적합한 인재는 박태준이라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육사 후배인 박태준의 청렴강직한 성품과 영특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박태준 동생이라면 사관생도 시절부터 수리 능력이 뛰어나서 세계 최고의 제철소를 단기간 내 효율적인 비용으로 건설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일화를 잠시 설명하면 박 대통령은 박태준 회장을 청와대로 호출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나. 제철소 건설을 성공시킬 사람은 태준 동생밖에 없네."

"난 태준 동생을 믿고 이 일을 맡길테니 한번 일생을 걸어보게나."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박태준 회장은 처음엔 어안이 벙벙하며 망설였으나, 박 대통령의 완곡한 부탁에 국가운명이 걸린 이 사업을 반드시 성공시키고 대한민국 경제를 살려 우리도 선진국처럼 잘살아 보겠다고 맹세을 한다.

초대 사장이 된 박태준 회장은 제철소 건설에 들어가는 자금을 차관으로 도입코자 미국을 방문하고, 정부 책임자를 자주 만나면서 눈물의 호소도 해보았지만, 미국 정부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에게 차관을 지원할 수 없다는 거절의 말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한국이 철강 생산 능력을 보유하면 머지않아 선진국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이 제철산업보다 다른 기초산업을 발전시키길 원했다.

이처럼 박정희 정부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포항제철소 건설의 일부 자금은 서독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을 활용했으나, 경부고속도로 자금으로 대부분 사용했기 때문에, 남은 자금으로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은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일본의 36년 한국 강점 시 한국인 66만 7648명의 부당한 노동 제공과 태평양전쟁 강제 군사동원(한국인 24만 2341명) 등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한일국교 정상화 협정을 어쩔 수 없이 체결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무상 3억 달러의 보상금을 받는다.

이 자금은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으나, 이러한 자금(국민들의 피의 대가)이라도 받아야 제철소 공장을 건설할 수가 있었고, 향후 철강을 한국 미래 경제산업의 먹거리로 만들면서 대한민국의 진정한 산업화와 선진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고, 이것이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끌어올리는 초석이 됐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지난 1978년 4월 1일 박태준 사장은 공기 준수를 위한 비상선포 후 2개월이 지난 1978년 8월 13일 `돌격` 휘호로 직원들의 의식을 재무장시켰다.  / 포스코
지난 1978년 4월 1일 박태준 사장은 공기 준수를 위한 비상선포 후 2개월이 지난 1978년 8월 13일 `돌격` 휘호로 직원들의 의식을 재무장시켰다. / 포스코

박태준 회장은 이 상황을 직시하고 박 대통령의 지시대로 부정부패를 뿌리 뽑고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제철소 건설에 매진한다. 물론 제철소 공장 건설 시 포항 영일만 일대에 뿌리를 내리고 수백년 살아왔던 주민들도 기꺼이 삶의 터전인 땅을 국가에 저렴하게 매각하면서 제철소 공장 건설에 힘을 보탠다.

그리고 박 대통령에 의해 포항제철 초대 사장으로 임명된 박태준 회장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즉시 포항으로 내려가 영일만 건설부지를 살펴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군인의 돌격정신과 불굴의 정신력으로 빠른 시일 내에 제철소를 완공하겠다고 다짐한다.

박태준 회장은 포항 주변의 호화시설인 호텔에서 기거하면서 건설을 지휘할 수도 있었지만 건설 경비를 최대한 절감코자 제철공장 부지 입구에 본인을 포함한 건설 관계자들이 먹고 자는 간이 숙소를 만든다(군대의 독신 장교 숙소시설인 BOQ: bachelor officers quarters 시설과 유사). 그리고 기숙사명을 `롬멜하우스(2차 세계대전 시 모래사막의 전투에서 백전백승하며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던 독일의 명장 롬멜장군 이름을 따옴)`를 건축한다. 또한 박태준 회장은 가족들과 멀리 떨어진 포항에서 제철소 공장이 완공되는 날까지 가족들과 모여서 식사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부모님 제사도 아내인 장옥자 씨에게 맡기고 본인은 오직 제철소 공장 건설에 몰두했으며, 제철소 건설 시 강하게 몰아치는 모래바람과 싸우고, 임직원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하루 3시간만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제철소 건설현장 곳곳을 발로 누비고 다닌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생활을 수년 간 해온 박태준 회장은 영일만의 세차게 불어오는 모래가 목과 폐로 넘어가 오랜 기간동안 축적되면서, 80세가 넘은 노년에 찾아온 지병(폐 질환)으로 83세에 인생을 마감한다.

임종 시 박태준 회장이 남긴 말을 정리해 보면 "포스코가 국가산업의 동력으로 성장한 것에 만족하고 더 크게 성장해서 타 경쟁사들이 추월할 수 없는 세계 최고가 되길 바란다. 그런데 나와 함께 포항제철소를 건설한 포스코 창업 1세대 중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아 안타깝다. 그렇지만 애국심을 갖고 남은 인생을 열심히 일 하기를 바란다", "평생 동지인 부인 장옥자 씨한테는 고생시켜 미안하다. 자녀들과 남은 인생을 화목하게 잘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박태준 회장은 병원비조차 조달하기 어려운 형편이 알려져 자녀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병원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한국 국민들이 병원비를 자발적으로 모아서 일부 충당한 일은 유명하다. 그리고 유족 대변인인 김명전 삼정 KPKG 회계법인 부회장은 "박태준 회장 본인 명의로 집도 없고 주식 한 주도 없다"고 기자들에게 말했었다. `청암`은 말년에 별도로 모아둔 재산이 없어서 큰딸 집에서 얹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포항제철에 25년 이상 근무하면서 한 푼의 비자금도 만들지 않았다. 향후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청렴한 정치, 경제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위대한 철강인이다.

박태준 회장의 갑작스러운 부고가 알려지자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 대한민국 산업화에 공이 큰 분이 우리들 곁을 떠나게 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애도를 표했다.

박태준 회장이 국무총리 시절 경제부총리로 같이 일했던 진념 전 경제부총리는 장례식장을 방문하고, "청암 박태준 회장은 우리나라 산업근대화의 일등공신 주역이며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산업을 키워서 오늘날 세계에서 품질과 가격경쟁력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철강회사를 만들었다"고 회고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기타 일반시민들이 장례식장(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조문하러 와서 장례는 마치는 날까지 문전성시를 이뤘다. 조문을 위한 시간이 몇 시간 걸릴 정도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옥자 씨와 1남(성빈) 4녀(진아, 유아, 근아, 경아), 맏사위(윤영각 삼정KPMG회장)와 막내사위(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가 있다.

마지막으로 살아생전 은퇴하고 은둔 생활을 하던 박태준 회장을 만나러 자택으로 찾아온 포스코 신임 회장과 경영진들에게 손수 붓글씨로 `溫故知新`을 써주면서 당부를 했다고 전해진다. 즉 공자의 말을 인용해 "포스코 역사를 제대로 알고 그 바탕 위에서 미래를 잘 준비해야 옳은 경영자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고 강조하며 전달한다.

그날 박태준 회장의 친필은 포항제철소 포스코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때문에 지난 2020년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포항제철소를 건설하고 "제철보국경영(철강을 생산해 국가에 보답)"과 "교육보국(포항과 광양에 총 27개 학교를 세우고, 한국기업 최초로 포항제철 임직원 자녀 대상 전액 대학 장학금 지원 제도 정립 및 한국 최초의 연구 중심대학 포항공대 설립운영을 통한 우수 인재양성)"한 철강왕 박태준 회장을 영원히 가슴속으로 기억 할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기획 연재 박광수 경남매일 논설위원>

박광수 경남매일 논설위원
박광수 경남매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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